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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문화거리는 장정일 형의 옛 자취가 담긴 곳이다. <영남일보 DB> |
2007년 6월의 어느 날, 문득 장정일 형이 보고 싶어 형의 옛 자취가 담긴 봉산문화거리와 인쇄골목 그리고 대구향교 주위를 홀로 거닐었다. 어수선한 구도심의 거리풍경은 도시재생사업의 시작과 맞물려 왠지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했다.
거리에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자 인파는 어둠 속으로 은둔하듯 사라져 버렸다. 적벽돌로 둘러싸인 화랑 유리문 안에는 큼지막한 솟대와 도기, 그리고 몇 점의 조소 작품들이 비단병풍을 배경 삼아 멋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유화가 걸려있는 연회색 칸막이벽은 간접 조명을 받아 더없이 따스해 보였다. 난 잠시 중식당 '영발장' 앞에 서서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을 들으며 잎이 돋고, 꽃이 피고, 과실이 맺듯 그런 감정이, 아니 그런 인연이 나에게 다시 찾아오길 기원했다.
봉산뜨란채 앞을 지나다 우연히 화가 K형의 개인전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동원화랑, 전시기간 6월1일에서 6월15일'. 장정일 형과 K형은 절친한 사이였고, 그렇다면 이 기간 내에 대구를 한 번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러자, '왜 나에겐 연락하지 않았을까?' 하는 소심한 생각에 난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상과 처음 만난 곳 홀로 다시 발길
작업실 앞에 서니 다시 벅찬 기억이
그런 감정, 그런 인연 다시 찾아오길
향교는 그 명칭만큼이나 정겹고 푸근했다. 철과 콘크리트만으로 가득한 도심에 이런 잔디와 예스러운 녹지 공간이 남아있다는 게 매번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축구장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잔디밭은 이곳 관리인의 꼼꼼한 손길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향교에서 나와 출판사가 즐비하게 늘어선 인쇄골목으로 향했다. 그렇게 형의 옛 작업실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미 셔터가 내려진 채 녹슨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었다.
예전, 이 건물 앞에 도착할 때면 매번 숨이 턱 멎곤 했다. 나의 우상이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건 정말 17세기 어느 남루한 행색의 무슬림이 톱카피 궁전 안에 살고 있다는 술탄을 알현하는 일처럼 더없이 경이롭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
1999년 12월의 어느 날, 형의 전화를 받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달려갔던 곳. 나에겐 마치 프랜시스 베이컨의 화실처럼 더없이 신비로웠던 곳. 삼국지를 계약하고 그 계약금의 일부분으로 장만했다는 이곳에서 형은 독서일기를 쓰고, 음악을 듣고, 형의 어머니가 준비해준 도시락을 먹으며 영화를 봤을 것이다.
일상처럼 울려 퍼지던 재즈음악과 필라델피아크림치즈가 발린 식빵, 이름 모를 와인과 삿포로 맥주, 핫트랙스나 단골 음반매장에서 꾸준히 사 모으던 CD음반들 그리고 책상 위에 전시되어 있던 'LIES/噓(講談社,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오늘따라 정말 그립다.
여담 하나.
1997년 봄, 난 현대문학 4월호 '신춘문예 당선자 특집' 코너에 '한 송이 장미꽃이 낙타를 구원할 순 없다'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지인의 도움으로 그 소설과 관련된 짧은 글 한 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지금은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님이 쓰신 소설평이었다. '초현실주의적 기법과 투명성'이란 부제를 단 그 글의 제일 마지막 문장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구는 무엇이뇨. 재사(才士) 셋을 낳았던 도시라 하면 어떠할까. 장정일씨, 박일문씨, 우광훈씨, 혹시 이인화씨도 이 대열에 낀다고 하면 어떠할까.'
대구의 재사가 되었다는 것보다도 형과 함께 언급되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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