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지주들의 복수

  •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 |
  • 입력 2022-09-06   |  발행일 2022-09-06 제22면   |  수정 2022-09-06 08:05

[3040칼럼] 지주들의 복수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가 비상이다. 8월 무역수지는 사상 최대 95억달러 적자다. 환율도 1,360원을 넘어 과거 세계금융위기 수준 턱밑에 도달했다. 환율이 오르면 물가가 더 오른다. 나라 밖 사정은 더 안 좋다. 스리랑카에 이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라오스, 미얀마로 외환위기가 불길처럼 아시아를 덮쳐온다. 달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숙명처럼 반복되는 일, 이번엔 우리 차례가 안 되도록 기도라도 할까. 적어도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달러를 내놓아서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국은행이 할 수 없는 일은 더 있다. 지난 7월 캐나다 상원의원 디안 벨르마흐는 금리인상으로 물가를 잡을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분명한 것은 이번 인플레이션이 수요(구매, 지출) 문제가 아니라 공급(생산) 문제라는 사실"이라고 현지 매체에서 주장했다. 그 말이 옳다면 지난 6월 미국 주간지 바론즈의 어느 기고문 제목처럼 한국은행도 "경기를 침체시킬 수 있을 뿐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고칠 수는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통화정책은 국내경제 수요를 조절할 수 있을 뿐 공급에 영향을 못 주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린다고 원자재 국제가격이 떨어지겠는가.

그런데 요즘 한국은행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더니 애꿎게 노동자들 임금인상을 탓한다. 올해 2월 영란은행 앤드류 베일리 총재가 임금과 물가의 연쇄 상승을 우려하면서 "노동자가 합리적이어야 하고 절제를 보여줘야 한다"고 언급했다가 몰매 맞은 적 있는데 그런 괴상한 소리를 따라 한다. 추경호 부총리에 이어 7월부터는 이창용 총재도 똑같다. OECD 통계로 한국 노동자의 연간 실질임금은 이미 2021년에 전년보다 평균 1.4% 삭감됐는데도 억지를 부린다. 차라리 베일리 총재가 낫다. 같은 기간 영국은 2.9% 올랐으니 말이다.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한국은행의 태도가 노동자한테 짐을 떠넘기며 협박하는 이런 식이어야 하는가.

통화정책은 계급적이다. 그것은 물가안정을 위해 실업의 규모를 관리하겠다는 생각이다. 가령 금리인상은 노동자 중 누군가는 다음번에 앉을 의자가 없을 것이라는 경고다. 놀랍게도 이 오징어 게임은 필립스 곡선이라는 이름으로 대학 경제학의 정규 교과에서 배우는 기본 내용이다. 그런데도 통화정책은 마치 중립적인 양 신성시된다. 그러나 보수적인 미국식 주류경제학의 세례를 받아 생각이 뻔하게 비슷한 분들의 결정이 무엇이 그리 중립적일까.

금리 오르는 것보다 물가 오르는 게 서민들한테 더 고통이라는 한국은행 주장도 틀렸다. 그 말은 일자리를 잃을 염려가 없는 소수한테만 맞다. 실업이 늘어나면 대개 물가보다 임금이 더 크게 떨어져 실질임금이 줄어든다는 실증분석 결과도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는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시장 약자부터 희생될 위험이 크다. 그렇게 통화정책은 쉽게 불평등을 키운다. 금리부터 올리고 보자는 주장은 그래서 무책임하다. 벨르마흐 의원이 옳다면 지금 방식으로는 물가는 못 잡고 실업만 늘어 결국 일자리도 임금도 줄고 불평등만 심화하고 만다.

정부도 한국은행도 노동자들한테만 고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창용 총재는 왜 독과점 대기업의 마진은 문제 삼지 않고, 왜 이윤과 물가의 연쇄 상승 위험은 우려하지 않는가. 가난한 노동자 말고 지불 능력 있는 독과점 대기업과 자산가부터 물가상승의 부담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통화정책이 어떤 책의 부제처럼 불로소득을 누리는 자산가들의 재산 가치 훼손을 걱정해 수익률을 올려 보상해 주려는 "지주들의 복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