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순섭의 역사공작소] 금관 이야기<5>

  •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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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9-07   |  발행일 2022-09-07 제26면   |  수정 2022-09-07 06:42

[함순섭의 역사공작소] 금관 이야기
국립경주박물관장

신라 사회는 발생부터 소멸까지 모든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정형화된 대관(帶冠)을 200여 년간 꾸준히 만들었다. 대량으로 만든 하나의 의장, 이것만으로도 동북아시아에서 대관의 중심지는 신라다. 왜 신라에서는 문헌 기록과 생활상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관을 착용했을까? 관복의 모자로서 관의 본질에 훨씬 가까운 모관(帽冠)을 제쳐두고 대관을 왜 더 많이 무덤에 묻었을까?

신라 금관에서 높이 솟구친 꾸미개는 연구가 시작된 이래로 그 모티프를 식물이라 판단해 왔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나뭇가지 모양 관', 한자로 '수지형대관(樹枝形帶冠)'이라 불렀다. 다만 광복 직후 경주 호우총을 발굴하며, 신라 금관은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조합한 것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근거로 사슴뿔 형상으로 꾸민 시베리아 샤먼 관을 내놓았다. 신라 금관과 샤먼 관은 근 1천500년의 시차가 있어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거의 모든 설명문은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조합한 게 신라 금관이라 반복한다. 신라 문화의 원류를 시베리아에서 찾는 시각은 일제강점기부터였지만 호우총 발굴 이후 굳어져 갔다.

하지만 신라 수지형대관의 장식은 그냥 나뭇가지로만 보는 게 좋겠다. 사슴뿔은 수컷끼리의 싸움에 적합하도록 가지가 한 방향으로만 자란다. 이에 비해 신라 금관의 가지는 식물의 생태 속성처럼 마주나기와 어긋나기를 그대로 표현한 모습이다. 아울러 1900년대 발굴로 대관이 재래 종교와 관련되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수지형대관의 소멸 단계에는 대관에 정치적 위상이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귀금속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구리판으로만 관을 만들었다. 동관(銅冠)은 충북 단양의 자연 동굴과 강원도 동해의 작은 무덤에서 나왔다. 구리관을 쓰고 가슴에 방울을 가득 붙인 동해의 할머니는 무당 그 자체였다. 불교의 공인 이전의 신라 재래 종교는 나무 정령이 깃든 소도(蘇塗)에 기반을 두었고 이후 신궁(神宮)으로 변하였다. 신라의 왕족을 비롯한 상층부가 신성한 나무를 관의 모티프로 삼았던 것은 너무 당연하다. 동북아시아에서 대관의 분포권은 불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과 거의 일치한다. 신라 왕족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부터 수지형대관은 조잡해지고 서서히 사라진다. 태어남은 각자의 방식으로 축복할지라도, 죽음은 종교 절차에 따르는 게 세계사에서 보편적이다. 종교의례에서 착용하던 것을 무덤에 가져가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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