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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 경제부장 |
수습기자 생활을 마친 뒤 신문사 안팎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던 말이 있다. 취재원에게는 겸손하고, 기사 출고 전까지 취재한 내용을 쉼 없이 확인할 것. 오감을 통해 확인된 것만 믿는 '팩트 신봉주의자'가 되고, 생소한 내용을 접할 땐 충분한 학습시간을 가진 뒤 취재할 것. 팩트가 틀렸을 땐 사과하고, 늘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 등이다. 이 과정 하나하나에 인내와 고통이 동반된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에 수없이 되뇌었던 말들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 '직업적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무기력감은 밀물같이 밀려온다. 워낙 가짜뉴스, 선정적 헤드라인, 강압·보복성 취재, 갈라치기 보도행태가 판치다 보니 가치관에 혼돈이 생겼다. 진영논리 프레임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본 뒤 그것을 사실로 믿는 '확증편향(確證偏向)적 사고'라는 강적을 만난 탓이다.
기자 출신인 한 정치인은 언론을 표방하는 단체와 협업해, 현직 대통령과 장관을 주인공으로 한 새벽 술자리 의혹을 국회에서 제기했다. 소속 정당 수뇌부까지 나서 총공세를 펼쳤다. 가짜뉴스 판명 가능성이 높아 사회적 여진이 크다. 진보성향 일부 신문·방송사들은 현 정부가 하는 모든 일에 꼬투리를 잡는 데 혈안이다. 결론부터 내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자료만 쫓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핀치에 몰리면 틀린 근거를 대라며 큰소리친다. 괴물(보수 진영)을 견제하기 위해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려는 걸까. 이면엔 '선민의식(選民意識)'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언론도 당연히 실수는 한다. 중요한 건 그 이후 대처다.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면 '유감(遺憾)'을 표명하며 상황을 매조지려 한다. 유감은 '마음에 차지 않아 서운함이 있다'는 의미다. 온전한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상대 진영에 빈틈을 보여 역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경계심리가 깔려있다. 맹종으로 쌓아 올린 '어긋난 대의'를 지키는 것에만 천착하는 부류인 셈이다.
불현듯 서울에 정착한 자식을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하면서 말과 글로는 '지방분권'을 부르짖는 지역의 지도층들이 떠오른다. 입으론 인권·자유를 외치지만 뒤로는 기득권 못지않게 잇속은 죄다 챙기는 '입 진보주의자' '강남 좌파'도 스쳐 간다. 본분을 망각하고 편가르기에 올인 하는 언론 속 확증편향주의자들은 이들보다 더 끔찍하다. 특정집단의 정신을 지배·조종하는 '가스라이팅'은 가공할 경제위기보다 두렵기 때문이다.
진영분리 고착화를 독려하는 사회에서 소통·협치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법이다.
네이버·다음 등 각종 포털이 언론사를 일렬종대로 줄 세우면서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뉴스 콘텐츠가 집중 양산되는 재미를 봤다. 언론 고유의 계도 및 합리적 비판 기능은 힘을 상실했다. 팬덤정치는 언론 망치기의 정점을 찍었다. 여론 갈라치기가 이에 동조한 언론계를 오염시켰다. 일부 기자들은 법관처럼 직접 잘잘못을 단죄하겠다며 날을 세우기까지 한다. 정치 유튜버들은 취재를 구실로 진영결속용 호재만 수집해 무차별 송출한다. 자연히 균형추를 잡으려는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진다. 상당수 언론이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빠졌다. 자율 정화가 시급하다. 양 극단 민주주의의 등에서 내려와 건강한 소통이 자리잡도록 균형자적 시각을 회복해야 할 때다.
최수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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