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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
세부 전공의 연구 관계로 지난 20여 년간 나는 스페인 북쪽 프랑스 접경의 바스크 지방에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자주 오가다 보니 바스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에도 관심이 생겼고, 독립투쟁과 자치운동, 게르니카 학살, 몬드라곤 협동조합, 구겐하임 미술관과 도시 재생 등에 관해서 취미 삼아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빌바오의 헌책방에서 샀던 인류학 단행본에서 왔다. '전쟁, 심판, 그리고 바스크 접경지의 기억: 1914-1945'라는 책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프렌치 바스크 접경지에서 벌어진 일들을 방대한 자료조사와 끈질긴 인터뷰를 통해 미시사의 방법으로 풀어낸 역작이었다. 저자인 산드라 오트 여사는 옥스퍼드대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평생을 프렌치 바스크 접경지 연구에 바친 분으로 글솜씨가 가히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20여 시간 동안 정말 빨려들 듯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대한민국 지식사회는 언제쯤 가야 이처럼 짙은 인문학적 지역 연구를 써낼 수 있을까 자문하던 기억이 새롭다.
한데, 최근 나는 마치 내 앞에 이 자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툭 던져진 것처럼 느끼고 있다. 지인이 알려 주어 단숨에 읽고, 푹 빠져버린 '낭만 경주'라는 작은 책 때문이다. 저자는 경주 태생으로 오랜 서울 생활과 외국 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온 해리라는 인물이다. 경주의 서정, 시간, 공간 그리고 대표적인 인물들을 꿰뚫는 저자의 글쓰기에는 토박이도 알 수 없고 나그네도 알 수 없는 경주의 비밀스러운 차원이 일관되게 겨냥되고 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담백하고 다정한 글쓰기가 일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크게 공감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주의 독특한 분위기를 달과 나그네 그리고 낭만으로 읽어낸 부분이다. 이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경주에 갈 때마다 저녁 먹고 일행과 같이 보문 호수길이나 황리단길을 걸을 때, 왜 그렇게 늘 흥겨워졌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지난 연말에 불국사 아래 괘릉에 갔다가 십이월치고는 아주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새삼 삶이란 것이 참 정처 없다는 상념에 빠져들었던 것도 일찍이 목월이 짚었던 객수(客愁)의 줄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경주의 낭만을 결국 사람의 문제로 보고 이를 대표하는 세 인물을 조명하는 대목이다. 수운 최제우, 매월당 김시습, 소성거사 원효. 저자는 이 세 인물을 조선의 메시아, 미친 존재감의 여행자, 거리낌 없는 자유인으로 각각 표현하는데 거기에는 왠지 저자의 뒷모습이 겹쳐지는 것 같아 흥미롭다.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결국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나는 경주 여행에서 만나야 할 세 인물, 아니 네 인물을 소개받은 셈이다. 어쩌면 하나의 여행으로서 삶 그 자체가 사람을 만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이나 장률의 '경주' 같은 영화가 주었던 피상성이 벗겨지고 꽤 아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영화의 감독이 이 책을 읽고 경주에 관한 다른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하면, 그 번역서를 읽은 외국 감독들이 경주를 무대로 영화를 찍으러 올 것 같다는 기대도 생겼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부탁이 있다. 기왕에 시작한 글쓰기를 본격적인 인문학적 지역 연구로 심화하면 좋겠다. 고려의 고승 일연이 신라의 천년야사를 기록한 지도 팔백 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경주에 쌓인 이야기도 그만큼 두터워지지 않았겠는가? 그 이야기의 지층을 탐사하면서 경주의 달과 나그네와 낭만을 더 깊이 보여 주기를 독자로서 기대하고 응원한다. 파이팅!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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