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버려진 책들은 어디로 쌓이나

  •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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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17 06:44  |  수정 2023-01-17 06:45  |  발행일 2023-01-17 제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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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쌓이는 책

책이 골칫거리가 되어 가는 듯하다.

언젠가 평론가와 지리산의 한 카페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주인이 백두대간을 혼자서 주파한 여성이라 화제가 됐다. 그녀가 그 사실을 쓴 책을 우리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 평론가는 받는 걸 주저했다. 당연히 고마워하며 받을 줄 알았는데, 주저하는 까닭을 묻자 그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집에 책이 많아서 골친데, 그 위에 또 한 권을 얹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일 년 전 많은 책들을 도서관에 기증했는데(도서관 기증이 10여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루어져, 다 합치면 수천 권은 되리라!), 그새 또 책들이 쌓였다. 주로 시집들이다. 매일 부쳐오는 책들과 잡지들이 두세 권씩은 된다. 그게 쌓이니 그새 시집들만도 수백 권이 되는 것이다. 받는 즉시 책장을 넘기며 일별하고, 눈길이 가는 책들은 몇 번씩 읽기도 한다. 그다음 쌓아두고는 한숨을 쉬는 것이다. 책을 보내주는 저자들에게는 고마움을 느끼지만, 책들이 쌓인다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결국 또 기증할 데를 찾게 된다.

책벌레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서에 엄청나게 몰두했던 때가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서점과 헌책방들을 뒤지며 책을 사 모으는 게 취미가 되다시피 했다. 당시 나오기 시작한 문고본들을 포켓에 꽂고 다니며, 읽기에 여념이 없었지. 책을 모으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재의 꿈을 꾸게 되었지. 결혼 후 겨우 집을 얻고, 작지만, 그 집의 한 방을 글을 쓴다는 핑계로 차지해 서재를 꾸미던 그 흡족함. 그랬던 것이 이제는 책이 짐이 된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주변에서 책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대부분 골치를 앓는다는 소리를 듣는다. 많은 교수들이 정년퇴임 후 가장 큰 문제가 책 처리라고 한단다. 감당이 안 되는 중요 자료들의 처리가 난제 중의 난제란다. 어떤 교수는 연구실 밖에 책을 쌓아 두고 학생들이든 누구든 필요하면 가져가라 했지만, 가져가는 이들은 극소수였다고 털어놓는다. 도서관마다 책들을 받기를 꺼려, 그중 상당수가 폐지로 나가기도 한단다. 어쨌든 책의 쓰임새와 더불어 욕망과 기대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뉴미디어·전자출판 실용화로
방대한 자료 인터넷으로 검색
문학·책의 시대 종언 예견에도
책은 사라지지 않고 발전·진화
새 멀티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지식의 기본적 그릇으로 존재"


-도서관들

책들을 버리는 데도, 도서관들은 왜 이리 많아지기만 할까?

나는 책들을 묶어서, 승용차에 바리바리 싣고 도서관으로 간다. 다행히 시집들을 흔쾌히 받아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안동 시내 들기 전 남선면 놉실로의 농촌으로 빠져 잠시 달리면, 노암마을의 논들 가운데에 '시집작은도서관 포엠'이 있다. 코밑과 턱에 성글게 수염을 기른 피재현 시인이 운영하는 도서관이다.

차를 마시며 도서관 운영에 대해 듣는다. 그동안 전국에서 책을 보내오는 문인들이 더러 있었단다. 그러나 상시 이용자들은 적은 모양이다. 농촌 구석에 이색 도서관이 생긴 건 멋진 일이지만, 그 일에 호응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도서관들이 생기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시든 소설이든 장르에 따라, 또는 전공별로 특수한 도서관이 있어서, '버려지는 귀중한 전공서적들'을 수합하여 요긴하게 쓰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전국적으로 그런 도서관들이 많이 생긴다. 안동만 해도 작은 도서관이 14개나 된다. 개인 도서관이 대부분이지만, 공설도 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도서관은 어린이 대상 도서관이다. 특히 그림책 도서관이 인기란다. 농촌 마을을 들렀을 때 도서관이 있는 걸 보면 괜히 기분은 좋다. 책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처럼 도서관들이 늘어나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책의 향수

책이 버려지는 건 일찍이 예견됐다. 이건 물론, 내가 책을 버리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2000년을 앞두고 많은 문예지들은 문학의 전망을 우려하는 기획을 통해 책의 시대의 종언을 우울하게 예언했다. 대구 계명대서 열린 문학의 전망 관련 세미나에서 나도 토론자로 참여했는데, 발제는 물론 토론에서도 온통 우울한 전망뿐이었다.

책의 시대의 종언은 뉴 미디어, 곧 인터넷의 발전 탓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출판이 나타나더니, 점차 상업적으로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다. 정보의 검색도 엄청나게 이루어진다. CD-ROM에 데이터를 내장한 각종 사전이 나오고, 검색전용의 단말기도 시판된다. 전자출판이 실용화된다. 이러한 뉴 미디어 시대가 올드 미디어의 대표적인 책을 도태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면 승객들 대부분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읽고 있다. 휴대폰의 정보를 뒤적이는 저런 건 어떤 독서의 모습인가? 그래,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책이나 도서관 이용보다는 우선 인터넷의 엄청난 정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버리는 이가 많다고 했는데, 사실 대부분의 논문들이 인터넷에서 검색이 가능하니,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단다. 조선왕조실록의 방대한 자료들을 서재에 두면 '폼'은 나지만, 실제로는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기에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새로운 전달 미디어가 출현할 때마다 책의 시대가 끝나리라는 우려가 있어 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책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미디어와 함께 더욱 발전해왔다"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새로운 미디어가 책의 생명력을 더 강하게 한다는 게다. 멀티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 어떻게 될까? 그에 따른 책의 형태와 제작 과정, 그리고 유통의 변화가 나타나겠지만, 여전히 지식의 기본적인 그릇의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어쨌든, 우리 같은 족속들에게 계속해서 쌓이는 책들은 책의 운명과 상관없이 골칫거리다. 아파트 문화에 적응하다 보니, 잦은 이사가 부담되고, 책을 쌓아둘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일까? 책이 아니어도 인터넷을 뒤적이며 읽는 그 정보 캐기가 무한정이기 때문일까? 그런 가운데서도 제대로 된 서재에서 '만권서'에 싸여 독서삼매에 빠진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며 격려를 보낸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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