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일의 소수의견] 지금 여기의 법치와 정치

  • 남재일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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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27  |  수정 2023-01-27 06:51  |  발행일 2023-01-27 제27면

[남재일의 소수의견] 지금 여기의 법치와 정치
남재일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한국 사회에서 '정치'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정치적'이란 관형어는 인간관계가 계산적이라는 뜻이며 '정치인'이 '정치꾼'이 되는 일도 다반사다. 하지만 정치인 뒷담화를 하다가도 막상 만나면 먼저 허리 굽혀 인사하는 광경도 낯설지 않다. 경멸과 숭배 사이를 오가는 이런 태도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권력에 분개하면서도 정치권력의 힘에 빌붙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던 오랜 권위주의 체제의 유산이다. 험난했던 지난 역사 속에서 한국인에게 정치는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 효율적인 처세의 전략으로 인식됐다. 한 마디로 정치는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도구화되어버린 것이다.

정치가 도구화된 사회는 권력의 남용에 무감각하다. 정치 과정의 모든 행위자가 남용되는 권력을 사실상 욕망하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이 만연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구화되지 않은 온전한 정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정치를 "시민이 스스로 사회적 삶의 형식을 결정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삶의 형식을 결정하는 행위'의 방법은 '법치'로 귀결됐고, 현대적 법치주의는 국가 운영의 기본 이념을 담는 제헌, 헌법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 제정된 법률을 사회에 강제하는 행정의 과정을 포함한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은 행정 권력의 통치를 정치의 전부처럼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 시민은 선거 때만 정치적 대리인을 뽑는 주권자의 위상을 갖고, 나머지 시간 전부는 법을 강제하는 통치의 대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정치를 통치로 이해하면, 시민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게 되면 행정권력의 법집행이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지 견제하는 주권자 시민의 역할은 잊기 쉽다. 결국 법치는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포괄적 정치의 방법론이 아니라 형법의 엄밀한 적용을 의미하는 엄벌주의로 축소된다. 법치를 형법적 엄벌주의의 좁은 틀에 가두면 헌법이 규정하는 가치를 법치를 통해 구현할 기회는 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시위가 형법을 위반한다고 엄벌로만 대처하면 행복추구권, 평등권 등 헌법상의 가치를 구현하는 진정한 법치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 정부 집권 이후 한국사회는 법치를 형법적 엄벌주의로 몰아가는 기류가 강하게 일고 있다. 법적용의 편파성 시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야당은 연일 이재명 대표에 대한 표적수사 중지와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 혐의에 대한 본격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사법권력의 남용은 죄 없는 자를 벌하는 것이고, 가장 흔한 사법권력의 남용은 죄지은 자를 벌하지 않는 것이다. 죄 없는 자를 벌하려면 필사적인 저항에 직면하고 공개적으로 행위의 정당성 평가에 직면한다. 하지만 죄지은 자를 벌하지 않는 것은 위험부담 없이 법을 사유화한다. 모든 이권이 여기서 발아하고 부패가 자란다. 한국사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적용 대상을 자의적으로 선정하는 선택적 법치주의가 고개를 든다. 이렇게 구성된 법치의 현실을 사실보도의 미명하에 언론이 받아쓰기하면 정치적 현실은 치명적으로 왜곡된다. 사법권력의 선택적 법치주의에 언론의 형식적 사실주의가 결합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사회적 흉기가 될 수도 있다. 형법적 엄벌주의 대신 헌법적 법치주의를 규범적 준거로 사법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언론의 비판적 여과 기능이 절실한 시점이다.


<경북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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