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
한국 사회에서 유튜브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명쯤 관심을 두는 여행 유튜버가 있을 것이다. 줄기차게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콘텐츠를 올려 주는 그네들 덕에 모두가 갇혀 살던 코로나 시대의 답답함이 적지 않게 풀렸다.
작년 하반기부터 여행 유튜버들을 통해 실감 나게 전해지는 소식이 하나 있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선진 각국에서 생활물가가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는 유튜브 동영상에 나온 LA 코리아타운의 김밥 가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현지의 지인에게 확인해 보기도 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서민의 생활물가는 철저하게 잡아주는 것이 선진 각국의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인데, 그마저도 위협받을 만큼 경제 사정이 힘든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유튜버들의 나라 밖 소식이 국내의 보통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제도권 언론들이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 주목하지 않는 사이 연말을 거치면서 국내의 생활물가가 엄청나게 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시중의 관심사는 압도적으로 생활물가의 앙등 문제다. 설날 식탁에서 난방비의 폭등이 성토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는 크게 보면 짧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유난히 추웠던 1월의 난방비가 고지될 2월 중순도 고비지만, 지하철과 시내버스 요금을 비롯한 각종 공공요금의 인상이 결정될 3월은 한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다른 수입이 없거나 줄어드는 가운데 생활물가가 올라가 버리면, 서민과 중산층이 기댈 곳은 결국 임금 인상밖에 없게 된다. 이래저래 전국 각지에서 임금협상이 벌어질 올해의 4월은 노사정에 험난한 계절이 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원래 작년 3월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만 해도 2022년 6월의 지방선거 이후 2년 동안은 큰 선거가 없으니, 특히 2023년은 새로운 정부가 야당과의 협치를 통해 각종 구조개혁을 추진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생활물가의 앙등조차 속수무책인 듯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기대를 유지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처럼 시중의 관심사와 정부 및 정치권의 움직임 사이의 간격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공간에는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가 모이기 쉽다. 정치적 도약을 꿈꾸는 새로운 인물과 세력에게는 국민에게 권력을 맡겨 달라고 호소할 최적의 무대가 생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3월 초순 집권 여당이 새로운 당 대표를 선출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내홍을 겪게 된다면, 이를 기회 삼아 새로운 인물과 세력이 급작스럽게 대두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주목해야 할 시점은 여야가 스스로 정한 선거법 협상 시한인 4월 말 이후이다. 만약 그때까지 여야가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 적용할 선거법안을 완성하지 못하고, 또다시 남 탓 공방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면, 새로운 인물과 세력은 난파한 민생경제의 재건과 정치권의 완전한 물갈이라는 최적의 명분을 내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 사회 어딘가에 이와 같은 인물과 세력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은 기성 체제가 무너지는 소리, 즉 '87년 체제'가 무너지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대한민국 정치권 안팎에서 '87년 체제'가 무너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치적 비약을 준비하고 있을까. 내겐 아무런 정보도 없지만, 그래도 그와 같은 인물과 세력이 여럿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2016년 프랑스의 30대 정치인 에마뉘엘 마크롱이 듣고 반응했던 그 소리를 대한민국의 젊은 정치인이 못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