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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더쿵 장단에 나는 현대의 시간에서 순식간 고대의 시간으로 틈입한다. 열정과 몰입 사이랄까. |
연재를 시작하고 바로 내 직업인 마임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조금 멋쩍은 일이기에 미뤄두었다. 흔한 주제라면 조금 더 묵혀둘 수도 있었겠지만 최근 부쩍 예술인보다는 일반인의 관심이 늘어난 것 같아 멋쩍음을 무릅쓰고 일차 다뤄보기로 한다. 최근 마임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아마도 소득수준이 늘면서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소통의 방식에 관해 관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공연이나 강의를 마치고 나면 관객이나 수강생으로부터 마임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왜일까? 몇 년 전만 해도 낯설어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며 어려워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전업으로 마임을 하는 배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짐작건대 코로나로 인해 디지털 미디어에 노출되는 시간이 늘면서 몸과 몸이 만나는 소통과 표현에 목마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마임은 보이지 않는 세계 상상해 모방하는 기술
무당의 '굿'에서 출발→광대의 '발림'으로 발전
일상의 몸짓에 큰 영향 미치는 것은 삶의 태도
코로나로 인해 다양한 소통 방식에 관심 늘어
혼 담긴 몸짓이 대화를 대신할 의사소통 도구로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표현을 소비한다. 그렇게 내 안으로 들어온 것들은 어떤 결정을 이룬 뒤 밖으로 배출되기를 기다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팬데믹 상황에서 자유로운 만남의 기회를 얻기도 힘들지만 만약에 만남을 갖는다 해도 나만의 진정한 내면을 전달하고 내가 애쓴 만큼에 대한 피드백을 얻기는 쉽지 않다. 오늘날과 같은 미디어와 언어의 홍수 속에서 나의 평범한 언어는 충분한 영향력을 갖기 어렵다. 그래서 유행하는 말을 동원하거나 단독이나 속보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잘 봐두었다가 전달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 현대인은 '나 여기에 있소, 날 좀 보소'하는 일에 목마르다. 그러니 요즘은 모두가 '관종'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술친구를 만나 푸념을 하고 너스레를 떨거나 골목에서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떨면 해소되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그만큼 우리의 내면은 복잡해졌고, 반면에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나 기회는 줄어들었다. 페이스북이나 기타 SNS는 소통의 속도와 관계를 확장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그렇게 관계의 양이 늘어날수록 몸과 몸의 만남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가상공간은 더욱 커질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상징에 의한 또 하나의 자연을 만들어 내고 우주 안에 디지털 공간이라는 또 하나의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그 가상의 자연은 실제의 자연과 공생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가상공간은 물리적인 실제의 자연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고, 실제의 자연 역시 가상공간에 의하여 규정되고 구획되고 조정될 것이다. 앞으로 실존이라는 말은 가상공간에 대하여 물리적인 자연을 뜻하는 말로 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머릿속은 엄청난 의미의 세계와 이미지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또 다른 이들의 세계와 연결되는 중이다. 그러나 그 머리는 몸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개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디지털 세계로 나아가는 인류의 진화에 재를 뿌리는 말 같지만 우리의 실존은 몸이다. 태어나고, 죽고, 아프고, 다치고, 우울하고, 흥분하는 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때 우리가 이룩한 가상의 세계는 더욱 그 푸름이 짙어진다. 흑백 사진의 음영이 사진 속의 인물을 더욱 멋지게 만들어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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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임의 시원
이제 본격적으로 마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누군가 영어인 마임(Mime)을 우리말로 '마음의 움직임'이라 풀었다. 척 봐도 그럴듯한 풀이다. 이것은 현대 마임의 정신을 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몸짓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 마임의 어원은 '모방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미모스(Mimos)다. 모방 즉 무언가를 흉내 내는 일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고대 인류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모방이란 모방의 대상이 나와 같거나 다르단 것을 이해하는 길이고 그 대상의 입장에 서보는 일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과 같이 신체의 일부가 불편한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 장애인처럼 되어보는 일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공옥진의 병신춤이다. 공옥진은 그들이 비장애인과 같은 사람들이며 또한 비장애인이 모르는 애환을 가지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한편 마임은 고대 그리스의 '사제'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지 않는 신의 모습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이다. 무당 역시 보이지 않는 귀신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이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면 마임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그 상상한 것을 다시 모방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기술은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신성한 역할을 하던 마임은 로마 시대에 와서 오늘날의 카바레 쇼나 격투기처럼 세속화된다. 권력과 물리적인 힘을 좇는 사회에선 몸은 볼거리로 전락한다. 언어가 힘을 잃은 사회에서 몸이 주는 쾌락은 소통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 무대에서 성행위를 보여 주거나 사형수를 처형하기도 했다 한다. 영화 노스트라다무스는 이와 같은 로마 시대 마임의 퇴폐적인 면을 잘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그와 같은 몸은 도시 바깥으로 쫓겨나게 된다. 로마의 마임은 이후 기독교가 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데 일조 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잠시 우리나라 마임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우리의 몸짓, 발림
우리나라의 마임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무당의 몸짓 즉 굿에서 연원을 찾아야 한다. 이후 굿이 세속화하면서 등장한 광대들의 몸짓을 발림이라고 했다. 발림을 굳이 서양의 마임과 비교한다면 발림은 마임과 같은 설명적인 묘사가 흥이 담긴 춤과 분리되지 않은 몸짓이라 하겠다. 물론 서양의 마임도 장르로 분화되는 르네상스 이전에는 발림과도 같이 춤과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이후 문예부흥기가 찾아온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탈춤이나 판소리와 같은 전문적인 연행이 크게 일어났다. 몸의 복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글의 제정으로 민중이 글을 갖게 되는 것과 함께 몸의 복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글을 모르는 것들이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니.
"때가 왔다. 때가 왔다. 바로 이때이다. 수만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이때, 대장부로 태어나 용천검을 쓰지 않을 수 없도다."
이와 같은 노래를 하며 수운이 추었던 칼춤에는 몸과 마음이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하나라는 시대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 마임의 두 번째 연원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패션의 명장 프라다는 마임을 배워 공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마임은 우리의 마당극과도 같이 저항정신을 담은 몸짓으로 여겨졌다. 천한 소재였던 비닐을 명품 가방의 소재로 격상시키는 그의 아이디어에는 역시 동학의 칼춤과 같은 시대정신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다.
◆현대 마임, 마음의 움직임
도시에서 쫓겨나 유랑하던 광대들은 마임이라는 몸짓에 마술이나 저글링 등의 다양한 묘기를 결합했다. 그렇게 해서 이탈리아에서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고 하는 우리의 탈춤과도 유사한 연행을 그리고 영국에서는 서커스와 같은 쇼를 창조하게 된다. 이런 흐름은 프랑스에서는 피에로(Pierrot)라고 하는 우울한, 영국에서는 클라운(Clown)이라고 하는 과도하게도 경쾌한 캐릭터를 낳는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무성영화의 귀재 찰리 채플린이 등장한다. 찰리 채플린이 미국의 무성영화 시장을 제패한 이유는 몸짓에 주제를 담는 능력에 있었다. 당시 무성영화 배우들의 연기는 슬랩스틱(slapstick)이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영국이 찰리 채플린을 낳았다면 프랑스는 현대 마임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티엔 드크루(Etienne Decroux)를 낳았다. 물론 수차 방한하여 공연한 그의 제자 마르셀 마르소가 대중적으로는 더 유명하다. 드크루는 19세기 말 과학의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동양의 연극 특히 일본의 노나 가부키와 같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담은 몸짓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몸짓이 언어보다도 강력한 소통의 힘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까지 볼거리와 감정에만 호소하던 몸짓을 팬터마임이라 부르고 마임을 따로 인간의 내면을 표출하는 시적 언어라 재규정했다. 누군가 영어식 표현인 마임을 '마음의 움직임'이라 풀었다. 척 들어도 그럴듯한 풀이다. 이 말엔 현대 마임의 정신이 담겨 있다. 마음이 담긴 몸짓이 마임이다.
◆마음이 하늘만큼 있어도 소용이 없다
맨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이제 대부분의 사람이 관종의 욕구를 갖는다. 잘난 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통을 하고 싶어서 관계를 맺고 싶어서다. 시각이 청각에 앞선다. 연극에서도 '선 동작 후 대사'라는 통상의 룰이 있다. 일상의 몸짓에서 상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태도다. 태도는 자세나 예절과 다른 것이다. 자세를 배우려면 부모님 말씀을 잘 듣거나 요가 또는 필라테스 강습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예절은 어른에게 배우면 된다. 그러나 태도는 나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 사람들은 용하게도 그 마음을 읽어낸다. 물론 마음이 하늘만큼 있어도 소용이 없다. 그 마음을 몸으로 담아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 몸짓이 야만에서 예술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우리말에 마음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숨을 들이마셔서 마음을 몸의 기운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용을 쓴다는 말의 정확한 뜻이다. 그러니 마임은 용을 써서 하는 움직임의 예술이다. 만약에 마임을 배우고 싶다면, 이런 뜻을 알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한다.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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