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alk] '관계의 온도' 펴낸 소설가 박지음, 소설이 된 돌멩이 하나…"또 누군가 그날을 알게 되기를"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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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24  |  수정 2023-02-24 07:58  |  발행일 2023-02-24 제14면
영남일보 신춘문예 등단 소설가, 여순사건 위령비서 작품 영감

우리 사회가 겪은 불행한 사건 '공간'을 키워드로 소설집 엮어

[Book Talk] 관계의 온도 펴낸 소설가 박지음, 소설이 된 돌멩이 하나…또 누군가 그날을 알게 되기를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앞에 놓인 작은 돌멩이들. '너무 몰랐습니다. 더 공부하고 화도 내고 알리며 살게요'라는 문구가 적힌 돌을 본 후 작가는 단편 '돌의 노래'를 쓰게됐다고 밝혔다. <박지음 소설가 제공>

201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지음 소설가가 두 번째 소설집을 펴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9편의 단편에서 작가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한 사건들을 외면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똑바로 바라본다. 여순사건과 5·18 광주와 같은 아픈 역사는 물론 이주 여성과 장애인 딸을 기르는 엄마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은 여전히 이 시대가 풀어야 할 과제처럼 보인다.

최근 영남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박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돌의 노래' '세도나' '너는 어디에서 살고 싶니' '해안 길을 따라가다 보면'에 나오는 작품 배경은 실제 박 작가가 눈으로 확인한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관계성을 작품 속에 생생하게 드러낸다.

"단편 '돌의 노래'의 배경은 여수입니다. 이 작품은 '여순사건'을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지난여름 여수로 떠난 가족 여행 중에 '여순사건 형제묘'라는 간판을 보고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125명의 사람을 죽여서 태워 버린 곳, 그 자리에 만들어 놓은 가묘가 '형제묘'라는 이름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가슴이 턱 막혔습니다. 발걸음을 조금 옮기자 이번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나타났습니다. 위령비 앞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작은 돌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무 몰랐습니다. 더 공부하고 화도 내고 알리며 살게요.' 박 작가가 본 문구는 이곳을 찾은 한 아이의 다짐이었다.

[Book Talk] 관계의 온도 펴낸 소설가 박지음, 소설이 된 돌멩이 하나…또 누군가 그날을 알게 되기를
소설가 박지음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눈앞에 돌멩이를 밤새 던져 엄마의 무덤을 만들어 주려는 어린 소녀가 떠올랐습니다. 엄마가 준 돌멩이를 쥐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평생 살아온 여자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써서 나 역시 화를 내며 알리면, 다른 누군가가 또 알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돌의 노래'는 여순사건으로 어머니를 잃고 선교사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여든이 되어서야 고향에 돌아온 수잔의 이야기다. 살기 위해 잊고 침묵하던 시간 동안 수잔으로 살면서도 끝내 순덕임을 잊지 않게 한 것은 엄마 순천댁이 건네준 돌멩이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수 여행 후 바로 미국에 사는 언니 집에 가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속에는 죠셉이라는 외국인 남자아이가 등장하는데, 죠셉의 모델은 지난여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미국인 형부 존입니다. 존은 열아홉 살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가 5·18을 겪었습니다. 단편 '세도나'와 연결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세도나'는 이미 익숙한 주제인 5·18 광주를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작가는 낯선 이국의 도시 세도나라는 공간에서 광주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Book Talk] 관계의 온도 펴낸 소설가 박지음, 소설이 된 돌멩이 하나…또 누군가 그날을 알게 되기를
박지음의 두 번째 소설집 '관계의 온도'

"'세도나'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사막 도시입니다. 인디언이 마지막까지 항쟁했던 곳입니다. 조카의 결혼식 참석차 그곳에 들렀는데, 피로연장에서 5·18을 두고 한국 교포들과 논쟁을 하게 됐습니다. 그분들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간첩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피가 끓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광주의 아픈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날 광주에 저는 없었지만, 그곳에 한 달 동안 갇혀 있던 셋째 언니와 그 도시에서 떨고 있던 외국인 형부 존 등 제 주변 사람들은 그날 광주에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광주와 미국의 낯선 도시 '세도나'에서 저만의 '광주'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단편 '세도나'에서 소설가 '나'는 80년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유린되고 난자당한 소녀에 대해 칼럼을 쓴다. 그리고 도망치듯 온 애리조나 사막에서 인디언 소녀의 환영을 본다. 조카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마주한 한국인 남성이 계엄군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소설은 또 다른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먼 곳에서 마주한 '광주'는 다시 그곳이 인디언 학살 땅이라는 사실과 포개진다.

단편 '너는 어디에서 살고 싶니' 역시 작가가 다녔던 '공간'이 실제 배경이다. 좀 더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딜쿠샤'라는 곳입니다.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가 머물던 종로구 행촌동의 집인데, 지금은 기념관으로 복원됐습니다. 딜쿠샤를 찾았을 때 벽난로가 눈에 띄었습니다. 벽난로를 중심에 두고, 집을 갖지 못한 여자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공간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를 찾아냈습니다.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 말을 곱씹으며 상상했습니다. 이 집의 옛 주인이었던 테일러 부부의 따뜻한 모습, 소설 속 화자의 아버지와 어린 화자가 고구마를 구워 먹던 따뜻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부유함이 아니라 그 공간에 누군가와 같이 있어서 행복해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며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박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소설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지했다"며 그것이 소설을 쓰는 이유라고 밝혔다.

"소설을 쓰면서 원하는 것은 사람들과 좀 더 따뜻한 관계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상처 주거나 상처를 받는 관계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로 손잡고 함께 글을 쓰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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