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예술 100년] 미술·연극 (2) 日 유학 작가 화풍 영향…대구 부호 후원 받아 최초 극단 '신극좌' 창단

  • 홍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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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4 08:27  |  수정 2023-03-24 08:35  |  발행일 2023-03-24 제35면

100년 전 대구의 미술은 개화와 근대성이라는 목적성을 가지면서 1920년부터 열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상정과 서동진, 박명조 등은 일본을 통해 화구와 표현의 방식을 도입하는 등 개화의 문을 연 화가로 평가받는다. 이후 대구의 여러 미술단체는 현대 미술을 선도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같은 시기 대구의 연극은 이기세와 홍해성 등이 일찍부터 무대 위에 섬으로써 시작됐다. 이기세가 '문예단'을 이끌며 대구좌(대구극장)의 신파극 공연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홍해성은 1920년부터 극예술협회를 조직, 대구는 물론 전국을 순회했다. 1953년에는 서울국립중앙극장이 키네마극장으로 옮겨와 4년을 머물렀다. 이러한 노력이 현재 대구의 많은 소극장과 극단을 이루는 원동이 되기도 했다.

조선견국경북미술대
주경을 대표로 조선건국경북미술대가 결성됐다. 서동균, 박상옥, 박인채, 서재문, 손동진, 김병욱, 장병찬 등을 중심으로 '유엔군 환영 간판 제작'과 '해방경축 기념 미술전시회'를 개최했다. 1945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모습.
이상정

미술

 1  1921년 이상정〈사진〉은 대구에서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는 백기만이 편찬한 이상정 유고집 '중국유기'에 기록돼 있다.

 2  1923년 대구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 작품전인 '대구미술전람회'가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열렸다. 이여성, 박명조, 서병오 등이 작품을 출품했다.

 3  1926년 박명조는 대구 최초의 수채화 개인전을 교남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했다. 교남기독교청년회관(옛 교남 YMCA)은 1924년 대구선교지부 청년전도를 위해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건너편에 건축된 후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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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회 창립전 리플릿

 4  1930년 향토회(鄕土會) 창립전이 조양회관에서 개최됐다. 창립회원은 이인성, 김성암, 박명조, 서동진, 김용준, 최화수 등이다. 전시 리플릿 맨 앞에 최연소 회원인 이인성 출품목록을 기록한 것을 보아 지역화단에서 이인성에 대해 갖는 기대와 후원을 느낄 수 있다.

 5  1931년 이인성은 일본으로 건너가 오오사마상회 크레용회사에 입사했다. 이인성의 일본 유학을 위해 지역의 유지들과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교장이었던 일본인 시라가 주키키의 도움으로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했다.

 6  1936년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가 7월15일부터 20일까지 경북도상공장려관에서 개최됐다. 향토회와 일본인 화가들의 모임인 대구미술협회를 비롯한 대구지역 미술가들을 결속시킬 목적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이인성, 김용조, 정경덕, 서병기, 정점식, 박명조를 비롯해 일본인 화가 다찌바나 요시오, 하마무라 후미오 등 한·일 작가 작품 60여 점과 일반 공모의 입선자 작품이 함께 전시됐다. 조선미전을 본떠서 만든 공모전 형식의 이 전람회는 당초 예상했던 수를 넘는 3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돼 입선발표가 지연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7  1936년 이인성이 양화연구소를 남산병원에 개설했다. 남산병원은 김재명 원장이 운영한 3층 건물의 병원으로 3층에는 '이인성 양화연구소'가 위치해 있었다. 이를 통해 작품제작과 후진양성을 위한 교습소 역할을 했다. 오전부·오후부·야간부 외에 특설 일요연구부로 나뉘어 인물·정물·풍경·석고데생을 지도하고, 봄·가을에는 회우 작품 경연회를 열어 우수한 작품은 연구소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회화재료를 동경에서 직접 가져와 제공하기도 하는 등 야심찬 계획을 갖고 모집했으며, 일본 화단에서 수채화가로 유명한 카스가베타스쿠가 연구소에 2개월간 체류하며 지도하기도 했다.

 8  1950년 이인성이 타계했다. 취중에 경찰과 시비가 붙어 다투던 중 경찰이 잘못 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됐다.

 9  1951년 청전 이상범 개인전이 대구미공보원화랑에서 열렸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 갔다 9월 서울수복이 되며 다시 서울로 간 뒤 1·4후퇴로 또다시 피란을 내려온 청전은 대구에 거처를 정하고 개인전을 개최해 전매를 기록했다. 작품 대부분은 미군들이 구입했다.

 10  1951년 이중섭 개인전이 대구미공보원화랑에서 개최했다. 2월24일 영남일보 주필이었던 구상의 주선으로 대구에 내려온 이중섭은 대구역 앞 경복여관에 거처를 정하고 서울 미문화원 직원이었던 맥타카트(훗날 대구미문화원 원장)의 도움으로 전시를 열었다.

태백화랑
태백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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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전경.

 11  1967년 태백화랑이 개관했다. 1959년 대구 최초의 외국서점인 태백서림(중구 포정동 3번지)의 창업주 박원식은 서점 옆 건물을 매입해 본격적으로 화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2  1971년 대구백화점 화랑 개관기념 향토작가초대전이 열렸다.

 13  1981년 대구문화예술회관 개관 기념 '대구현대미술 14인의 시각전'을 개최했다.

 14  1993년 돈보스꼬예술학교(현 대구예술대)가 개교했다.

 15   2011년 대구미술관이 개관했다.

키네마극장(한일극장)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 한일극장. 당시에는 키네마극장이라고 불렀다. 키네마구락부라고 적혀있다.

연극

 1  1907년 대구 최초의 실내무대극장 니시키자가 문을 열었다. 대구의 화옥여관과 부산의 요정 화월의 주인인 나카무라가 연극, 영화, 신파극 등 다양한 행사를 위해 개관했다. 함석지붕의 바로크식 건물로 1919년까지 운영된 극장으로 일본인이 일본인을 위해 세운 극장이다.

 2  1918년 대구 최초의 극단 '신극좌'가 창단됐다. 김도산은 대구의 부호인 정인기의 후원으로 극단 신극좌를 만들었다.

 3  1925년 9월 대구무대협회가 창단됐다. 신극으로 데뷔하고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던 서울 출신 안종화는 대구에서 대구사람들과 극단을 만들었다. 대구사람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실질적인 대구 최초의 극단이다. 신파극이 아닌 신극을 정식으로 연습해 9월1일부터 4일까지 연극전용극장인 만경관에서 창단공연을 하였다.

 4  1930년 대구가두극장이 창단됐다. 1920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의 일환으로 탄생한 극단이다. 극단의 중심인물은 이상춘과 이갑기였다. 당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은 계급의식을 연극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을 띠었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감시가 심한 서울을 피해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 출발지가 대구였다.

 5  1938년 8월 키네마극장(현 CGV 대구한일)이 개관했다.

 6  1945년 9월1일 키네마극장에서 '깃발을 흔들던 날'이 공연됐다. 광복 후 한국에서 공연된 최초의 공연이다. 가수로 널리 알려진 성주 출신의 백년설이 만든 봉화가극단에서 제작해 키네마극장에서 공연했다.

 7  1947년 대구의대연극부가 '에밀레종'을 키네마극장에서 공연했다. 에밀레종 이외에도 1947년에만 무의도 기행(대구문리과대), 바보와 대학생(대구사범대), 흙(대구농대), 홍길동전(대구사대) 등의 작품을 지역 대학에서 준비해 키네마극장에서 공연할 정도로 광복 후 대학극 활동은 활발했다. 이 당시 활발했던 대학극은 6·25전쟁 시기 국립극장의 연수생 제도로 만들어진 영남연극회의 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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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중앙국립극장 개관 기념작 '야화'

 8  1953년 2월 대구 중앙국립극장이 개관했다. 서울의 중앙국립극장이 대구의 문화극장(구 키네마극장)으로 이전하여 개관했다. 설날에 맞춰 공연한 개관기념작은 윤백남 작, 서항석 연출의 '야화'로 당시 최고인기 영화배우였던 김승호, 최은희가 주연배우로 출연했다.

 9  1957년 12월 연출가 홍해성이 작고했다. 1896년 대구 덕산동에서 태어난 홍해성(본명 홍주식)은 대구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일본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와세다대를 다니던 극작가 김우진을 만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며 연극을 시작한다. 귀국 후에는 극예술연극회에 가입하여 단 공연평을 담당했고, 극예술연구회 직속 실험무대의 제1회 공연작품인 '검찰관'을 비롯해 제2·6·9회 공연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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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구연극계 통합의 단초를 제공한 극단 '인간무대'의 셰익스피어 작, 이필동 연출 '햄릿' 입장권.

 10  1970년 연극 '햄릿'(셰익스피어 작·이필동 연출)이 KG홀에서 공연했다. 530여 석 규모의 KG홀 5회 공연에 5천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 기마경찰까지 동원돼 질서에 나설 정도로 대성공한 공연이다.

 11  1977년 150석 규모의 Y소극장이 개관했다. 1천600석이나 되는 대구시민회관은 대관료가 비싸 특별한 행사용 공연에 이용됐다. 관객을 모두 채우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예식장, 학교강당 등에서 연극을 공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Y소극장은 연극인에게 굉장히 소중한 공간이었다.

 12  1983년 극단 처용이 창단된다. 순수하게 대학연극반 출신으로만 구성된 극단이다.

 13  1991년 대구연극인협회가 설립됐다. 대구연극협회장 선거와 대구시립극단 창단에 관한 입장 차이로 대구연극협회에서 탈퇴한 대구무대, 우리무대, 처용이 만든 협회이다. 1년 만에 대구연극협회에 재입회하며 대구연극인협회는 사라졌다.

 14  2001년 연인무대(대표 한전기)가 제주에서 열린 제19회 전국연극제에서 단체상인 대상과 연출상(한전기), 최우수 연기상(이성민)을 수상했다.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이성민은 이후 서울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영화와 TV 등 활동 분야도 넓혀 다양한 매체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인기가 높은 배우가 된다.

 15  2017년 제2회 대한민국연극제가 대구에서 열렸다. 한국연극협회 주최로 개최되던 전국연극제가 2016년부터 대한민국연극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과 봉산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구 대표로 참가한 극단 고도가 '아비, 규환'(안희철 작·이현진 연출)으로 금상을 받았다.

〈대구시 제공〉
정리=홍석천기자 hongsc@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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