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정치 현수막은 또 다른 언로(言路)다

  • 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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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2 06:49  |  수정 2023-09-20 17:45  |  발행일 2023-03-22 제27면
변종현 편집국 부국장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대구의 거리가 무척 뜨거워졌다. 조금 더 알아보니 전국적 현상이었지만, 각 정당에서 내건 플래카드, 소위 '정치현수막'이 심상찮다. 정치행위로 간주돼 옥외광고물관리법 규정을 받지 않는 데다 지자체 신고·허가도 필요치 않아 최근 그 수가 부쩍 늘었다. 늘어난 개수도 개수지만 근자에 더욱 주목되는 점은 글귀가 쌈박해졌다고나 할까, 재치가 느껴진다. 예산 확보 등을 자랑하는 개별 정치인의 낯 뜨거운 공치사나 정당 홍보 일변도에서 벗어난 것도 경향이라면 경향이라 하겠다. 과거 같으면 보도자료 뿌리는 것으로 그쳤을 일을 기어이 거리로 끄집고 나오는 데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듯하다.

올초 한 방송사가 우리 국민의 정치성향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보수와 진보 비율은 24~28%로 엇비슷하게 나타난 반면 중도 비율은 무려 48%에 달했다. 지난 대선에서 당락을 가른 표차가 '0.7%포인트'였다는 점에서 중도층 비율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중도층을 잡는 쪽이 대권도 잡고, 의회 권력도 잡는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수사(修辭)가 아니었다. 문제는 하루아침에, 혹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 중도층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스윙보터(Swing Voter)는 속성상 갈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시간을 두고 큰 흐름에 동조하는 특징도 있다. 이러한 점을 파고든 것이 바로 정치현수막이다. 짧은 문장 하나로 비교적 장기간 이슈 파이팅을 할 수 있고, 특정한 정치적 행위나 개별 정책에 대한 중도층의 관심도 환기할 수 있어 정치적 효능감이 높다. 특히 먹고사는 데 바쁜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겐 매일 거리에서 만나는 정치현수막이 그 어떤 매체보다 강한 소구력이 있다.

최근 정치현수막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시민 불쾌지수를 높인다는 둥, 국민을 갈라치기한다는 둥, 정치혐오를 조장한다는 둥의 이유를 댔다. 한 정치학자는 이러한 심리 기저에는 자신의 정치 성향과 정반대의 주의·주장이 공공연하게 내걸리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불쾌감이 자리한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 정치현수막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환경단체의 반발도 나온다. 이유인즉슨 현수막이 화학섬유로 제작됐기 때문에 소각할 경우 발암물질 배출이 우려돼서다. 이게 통했을까. 법 개정을 통해 다시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요즘 내걸린 플래카드를 다시 한번 보자. 정말 비판받아야 할 만큼 문제가 많은 걸까. '와 이카십니까? 독립투사가 지하에서 웁니다' '검사아빠 전성시대' '민주당이 정쟁에 몰두할 때 국민의힘은 민생에 집중합니다' 여기 어디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글귀가 보이는가. 오히려 위트와 풍자가 있어 입꼬리가 올라간다. 물론 정색하고 상대 당을 저격하는 글귀도 더러 있다. 하지만 정당정치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동물국회처럼 몸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확성기로 떠들어대는 것도 아닌데 정치성향이 다르다고 이걸 막으려 하는가. 현수막 난립은 자정(自淨)의 문제이고, 글귀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국민, 더 정확하게는 중도층의 몫이다. 

표(票)로 먹고 살면서 정작 시민이 정치에 관심 갖는 것을 싫어하는 정치인이 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DK(Don't Know)그룹'의 시선마저 정치현수막에 뺏길까 봐 두려워한다. 신하가 임금에게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언로(言路)라 했다. 길거리 플래카드는 국민주권시대 또 다른 성격의 언로다. 나라 주인인 국민에게 정치인들이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길, 그 길은 어떤 이유에서든 막아선 안 된다. 비록 보기 싫고 듣기 싫어도 말이다. 
변종현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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