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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 1㎏ 거래 공모 혐의로 탕가라주 수피아가 26일 싱가포르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예정이다. 지난 23일 탕가라주의 여동생 릴라바시 수피아(가운데)가 오빠의 선처와 재심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들고 가족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
"자네들, 기자란 놈들은 뭘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이 동네 돌아가는 판을 보고나 있나?"
지난 일요일 저녁나절, 인권운동가인 싱가포르 친구 전화를 받았더니 대뜸 호통질을.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그이한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기자 대표선수로 또 꾸지람부터 들었다. 싱가포르 쪽으로 눈 돌릴 일이 좀체 없던 나는 미안한 맘에 "이번엔 무슨 일인가? 사연이나 들어보자"며 좀 부풀린 웃음을.
"싱가포르 정부가 대마초 1017.9g 땜에 사형 집행하겠다는 거야."
그러잖아도 버마 민주화 운동가로 이름 날린 내 친구 지미(쪼민유)가 지난 해 군사정부한테 사형당한 뒤로 사형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터라 이내 숨이 콱 막혔다.
사연은 이랬다. 싱가포르 고등법원이 2018년 마약 밀매자 둘과 전화번호로 연결된 탕가라주 수피아(46)한테 대마초 1㎏ 거래 공모 혐의로 사형을 때렸다고 한다. 탕가라주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타밀어 통역 도움을 못 받았다고 밝혀 사법 정의마저 논란거리였다고.
그리고, 오늘 수요일이 바로 그 탕가라주 사형 집행일이라고 한다. 탕가라주 가족이 대통령한테 탄원하고 인권운동가들이 사형집행 중지를 외쳐왔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소 닭 보듯 여태 아무 대꾸도 없고.
이렇게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해 마약 관련자 11명을 사형한 데 이어 여섯 달 만에 또 사형을 꺼내 들었다. 싱가포르는 이 지구에서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마약 관련 범죄자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오직 네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웃 타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지난해 타이 정부는 대마초 합법화에 이어 대마초 묘목 100만그루를 시민한테 나눠줬다. 그로부터 국수, 피자, 아이스크림, 케이크, 차, 주스, 커피 같은 먹을거리에서부터 치약, 강장제, 오일, 향수에 이르기까지 대마초를 섞은 온갖 상품이 나돈다.
지난해 지적장애인 사형 강행
국제사회 큰 비난 받았던 정부
대마초 1㎏ 밀매 공모 혐의자
6개월 만에 다시 형집행 예정
사형 선고자 대부분 소수인종
민주주의 불량국 야만적 살인
강력처벌, 범죄예방 비례않아
유엔 총회도 제도 폐지 결의안
나라마다 다른 법을 존중한다손 치더라도, 기껏 대마초 1㎏으로 정부가 사람을 죽이는 짓까지 인정해야 할까? 국가로 위장한 정부가 저지르는 합법적인 살인, 이게 사형이고 이게 문명도시를 자랑해온 싱가포르에서 벌어져 온 일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사형 집행으로 말썽을 빚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싱가포르 정부는 헤로인 44g을 들여온 죄목으로 10년 넘게 감옥살이한 말레이시아 출신 지적장애인 나가엔트란 다르밀링암(34)을 사형해 국제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유엔까지 나서 범죄 사실조차 인식 못 하는 나가엔트란의 사형 집행 중지를 호소했으나 싱가포르 정부는 기어이 교수형으로 대꾸했다.
나가엔트란 사형 집행은 그동안 인종차별로 의심받아온 싱가포르 정부의 민낯이 잘 드러난 사건이기도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사형수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지만, 2021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그동안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 거의 모두가 소수 인종인 사실을 지적했다. 예컨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마약 범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44명 가운데 중국인이 4명, 인디아인이 3명, 말레이시아인이 37명으로 드러났듯이.
그럼에도 2022년 싱가포르 내무부는 70% 웃도는 시민이 사형제를 지지한다는 조사 자료를 내밀며 사형 집행의 정당성을 우겼다. 으레 시민사회에서는 반발도 만만찮았다고 한다.
"언론자유가 없고 개인의 자유가 제한당한 민주주의 불량국에서 정부 말을 곧이 듣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사형이 국가 폭력의 연장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름 밝히기를 망설이는 싱가포르 인권운동가인 내 친구 말이다. 오죽했으면 인권운동가마저 정부를 두려워하랴! 이게 싱가포르 현실이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내놓은 2022년 세계 언론자유지표에서 싱가포르는 180개 나라 가운데 139위다. 캐나다의 보수 자유주의 공공정책 싱크탱크인 프레이저 연구소가 밝힌 2022년 개인의 자유 분야에서 싱가포르는 165개국 가운데 81위다. '이코노미스트'는 2022년 세계 민주주의지표에서 167개국 가운데 70위를 차지한 싱가포르를 '민주주의 결함국'으로 꼽았다. 위 지표들에서 50위쯤을 넘어서면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싱가포르 정부에 시민 목숨이 달린 사형을 맡겨 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내친김에 싱가포르 이웃들을 훑어보자. 현재 싱가포르를 낀 아세안(Asean) 열 나라 가운데 사형제 폐지국은 필리핀과 캄보디아뿐이다. 나머지 타이, 버마,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는 모두 살벌한 사형제와 그 집행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이건 아세안이 본보기 삼아온 유럽연합(EU)이 사형제 폐지를 가입국 조건으로 내건 현실이나, 이미 70% 웃도는 나라가 사형제를 폐지했거나 사형 집행을 멈춘 세상과도 한참 동떨어진 꼴이다. 사형을 놓고 보면 동남아시아가 최악지대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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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주최로 열린 '한국 천주교 현직 주교단 전원과 사제·수도자·평신도 등 7만5천843인 사형폐지·대체형벌 도입 입법청원' 기자회견에서 김선태 주교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런 아세안에 사형제 폐지의 희망이 싹 텄다. 그것도 폐쇄적이고 고압적인 정치로 따져 싱가포르와 쌍벽이었던 말레이시아로부터 피어났다. 지난 4월3일 말레이시아 하원이 중범죄인을 무조건 사형하는 이른바 '사형선고 의무제'(Mandatory Death Penalty)를 폐지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은 사형을 때릴 수 있는 34개 범죄와 특히 살인, 마약 밀매, 납치, 테러처럼 반드시 사형을 선고하는 11개 법에 적용하도록 못 박았다. 아울러 이 개정안은 사형 대신 30~40년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법원에 재량권을 줬다.
이 새 법에 따라 현재 법정에서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거나 이미 모든 법적 항소를 소진한 1천300명 웃도는 이들이 양형 재심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18년부터 사형 집행을 멈추고 사형제 완전 폐지를 밀어붙인 말레이시아 정부가 사회적 반발에 부딪혀 비록 사형선고 의무제 폐지에 그쳤지만 사형악성지대 아세안에 귀한 본보기 감을 던진 것만큼은 틀림없다.
이처럼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달리 사형제 폐지는 이제 인류사적 보편성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유엔 가입국 193개와 2개 참관국 가운데 111개국이 사형제를 완전 폐지했고, 24개국이 10년 이상 사형 집행을 멈춰 폐지국 반열에 올랐고, 7개국이 전시 사형만 허용해 실적적인 사형 폐지국이 73%인 142개국에 이른다. 이건 사형지상주의자들이 우겨온 사형의 범죄 예방 효과가 실효성 없는 야만적 제도란 사실을 국제사회가 인정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엔 총회는 2007년부터 두 해마다 사형제 폐지를 목표로 사형 집행 일시적 유예 결의안(Global Moratorium on the Death Penalty)을 내놓았다. 그동안 기권해온 한국 정부는 2020년 문재인 정부에 이어 2022년 윤석열 정부가 그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84개국이 참여한 2022년 표결에서 한국과 독일을 비롯한 125개국이 찬성했고, 민주와 인권 챔피언을 자임해온 미국은 적성국 중국, 이란, 북한을 비롯한 37개국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타이와 모로코 같은 22개국은 기권했고.
이렇듯 유엔 총회 결의안에서도 사형제 폐지가 세계시민사회의 염원임이 드러났다. 오늘, 수요일이 지나고도 싱가포르 사형수 탕가라주가 살아있기를 애타게 바라는 바로 그 마음들이다.
이제 우리를 둘러본다. 한국은 26년 전인 1997년을 끝으로 사형 집행을 멈춰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 반열에 올랐다. 우리는 대통령 후보 시절 법률 전문가 윤석열의 용기 넘친 인터뷰를 기억한다. "강력한 처벌이 범죄 예방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여러 분석 결과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름만 남은 사형제를 폐지 못 할 까닭이 없다. 흔히들 60%에 이른다는 사형제 반대 여론 앞에 지레 주눅들 것도 없다. 정부가 당당히 옳은 길로 나간다면 여론을 돌려놓을 수 있고, 그게 시민사회를 끌어가야 할 정부의 의무다.
정부란 건 범죄로부터 시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지녔다. 정부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결과를 사형으로 덮어버린다는 건 아주 잔인한 직무 유기다. 하여 우리는 동정심 따위로 사형제 폐지를 말하지 않는다. 무책임한 정부의 국가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자는 뜻이다.
〈국제분쟁 전문기자·방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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