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3] 북천전투와 정기룡 장군

  • 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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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0 07:53  |  수정 2023-05-24 07:50  |  발행일 2023-05-10 제12면
북천서 임란 중앙군 첫 전투…감복한 王은 상주 전역 부역 면제
왜군상륙 12일만에 교전…日 조총부대 맞서 800여명 산화
'육지의 이순신' 정기룡, 백성과 합동작전 성공 읍성 되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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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시가지 외곽을 따라 흐르는 북천 뒤쪽으로 임란북천전적지가 보인다. 전적지에는 임란 당시 북천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들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등이 고요히 자리해 있다.

상주의 시가지 외곽을 따라 북천이 흐른다. 백두대간의 백학산과 윤지미산에서 발원해 병성천이 되었다가 낙동강이 되는 천이다. 북쪽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천봉산이고 남쪽에는 갑장산, 동쪽에는 병풍산, 서편에는 노음산이 의젓이 섰으니, 상주의 명산이 모두 모여 북천을 귀하게 감싸고 있다. 봄에는 벚꽃이 나리고 가을에는 낙엽이 흩어지고, 여름에는 물놀이장이 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된다. 또한 상주의 온갖 축제와 행사가 북천 변에서 열린다. 사계절 밤낮없이 북적대는 시민의 휴식처이자 놀이터가 바로 북천이다. 시간을 거슬러 1592년 4월25일, 천지에 꽃들이 하늘거렸거나 혹은 꽃샘추위가 저고리를 파고드는 그런 봄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 북천 변은 임진왜란의 전쟁터였고, 우리의 관군 60여 명과 의병으로 일어난 상주사람 800여 명이 모두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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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경상감영공원에는 임란 당시 상주성 탈환에 성공한 정기룡 장군을 형상화한 동상과 기념탑이 서있다. 오른쪽은 정기룡 장군 묘소 입구에 위치한 신도비.

◆상주 북천전투와 임란북천전적지

1592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군의 침략 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은 4월17일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영남으로 급파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7천여 명의 왜 육군 1부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한 것은 4월23일이다. 상주성을 지켜야 할 상주 목사 김해는 벌써 도망쳐 버렸고 판관 권길이 상주를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판관을 시켜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게 하고 관아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군사를 모집했다. 이렇게 관군 60여 명과 급하게 모인 민병 800여 명으로 조선 최초의 주력 병력이 편성됐다. 대부분이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이었다.

북천 냇가에 진을 치고 훈련이 시작됐다. 이미 선산까지 진출해 있던 일본군은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 정찰하고 있었다. 24일 왜군은 상주의 남쪽 장천으로 진입했고, 25일 동트기 전의 새벽, 북천을 건넜다. 곧바로 왜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총부대의 일제사격에 조선의 기병들은 말을 탈 틈조차 없었다. 조선군의 화살은 왜군의 대열에 미치지도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순변사 이일은 단신으로 도망쳤다. 상주 판관 권길, 상주목 호장 박걸, 종사관 윤섬, 종사관 이경류, 종사관 박호, 사근도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의병장 김일 등이 죽기로 맹세하고 싸웠으나 조선군은 결국 전원 산화하였다. 북천전투는 왜군에 대항해 우리 중앙군이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였다. 이 일을 안 선조는 상주 전역에 부역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내렸고, 상주는 왕의 은전을 입은 우리나라 유일한 곳이 되었다.

천봉산의 남쪽 자락 봉우리가 자산(子山)이다. 자산 아래 '임란북천전적지'가 있다. 찰랑거리는 푸른 북천이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기와를 얹은 돌담에 삼문이 높다. 전적지에는 북천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들과 북천 전투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등이 고요히 자리해 있다.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에는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종사관 윤섬·박호·이경류 3충신과 의병장 김준신·김일 2의사, 상주 판관 권길, 호장 박걸, 사근도찰방 김종무 그리고 순국무명열사 9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양력 6월4일에 제향하고 있다.

전적지 가운데에는 임란북천전적비가 우뚝 서 있는데 거기에는 북천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절창으로 새겨져 있다. '지금도 자산을 철환산이라고 하는데 비나리는 어스름 달밤에는 귀화가 흐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충의혼백이 슬프고 분한 원한을 품은 지 사백여 년 새와 짐승과 솔소리만이 그 넋을 위로하던 곳 이제 전적지로 지정 정화하여 역사와 충렬과 자위의 산교육의 터전으로 삼는 한편 충렬사를 세워 절개와 의리에 산 지휘관 및 이름조차 밝힐 길 없는 수많은 병졸의 영령을 위안하고 숭고한 호국의 뜻을 길이 빛내며 지난 일을 귀감 삼아 내일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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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경상감영공원에는 임란 당시 상주성 탈환에 성공한 정기룡 장군을 형상화한 동상과 기념탑이 서있다. 오른쪽은 정기룡 장군 묘소 입구에 위치한 신도비.

◆정기룡 장군의 상주읍성 탈환과 충의사

북천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장 도다 가츠타카(戶田勝隆)가 2천800여 병력을 거느리고 상주읍성에 주둔했다. 그즈음 정기룡(鄭起龍) 장군은 상주읍성 탈환의 임무를 띠고 갑장산 영수암에 도착한다. 장군은 불시에 속전속결로 상주읍성을 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1592년 11월23일 밤, 상주의 남쪽과 북쪽의 산 능선 가득 횃불이 타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부녀자들이 일제히 북과 징, 꽹과리를 치고 태평소와 나팔을 불어 굉음을 일으켰다. 읍성의 서북쪽 담벼락에 쌓아 놓은 관솔 횃불에도 일제히 불이 붙었다. 불길이 바람을 타고 올랐고 세찬 불꽃은 하늘까지 뻗쳐 너울거렸다. 자고 있던 일본군은 크게 당황했다. 사방에서 시뻘건 화염이 타오르는 가운데 온갖 풍물 소리가 귀를 찢고 혼을 흔들었다. 남북 먼 산마루에서부터 가까운 읍성 주변에 이르기까지 조선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의병과 백성들은 재빨리 남·서·북문에서 동시에 쳐들어갔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속수무책으로 흩어졌다. 일본군 100여 명이 왜장 도다 가츠타카를 호위하여 유일하게 불길이 없는 동문을 향해 달렸다. 그들이 동문을 나서는 순간 밤나무 숲에 매복했던 의병과 백성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박달나무 방망이를 휘둘렀다. 상주 의병과 백성은 완벽하게 승리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노약자와 부녀자가 절반이 넘는 상황에서 조총을 가진 일본군 수천 명을 전멸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후 정기룡은 6년 동안 상주를 거점으로 경상도를 굳건히 지켰다.

북천은 시가지를 벗어나 병성천과 합류해 사벌면 금흔리 남쪽 자락을 적시며 낙동강으로 간다. 그곳 금흔리에 정기룡 장군의 무덤과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정기룡 장군은 1562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곤양(昆陽), 호는 매헌(梅軒)이다. 20세에 상주로 이사를 왔고, 25세에 무과에 급제해 신립(申砬) 휘하의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31세에 임란을 맞은 그는 거창, 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하는 등 충청과 경상도를 오가는 전투에서 승리, 불과 1년 사이에 무려 10 품계나 뛰어올라 1593년 32세 때는 경상도 북부 28개 고을을 관장하는 상주 목사가 되었다. 선조는 "장군이 없었으면 영남을 잃었을 것이요, 영남을 잃었으면 나라를 잃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임진왜란 동안 장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60여 회나 치르면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50명의 기병으로 수천 명의 왜적을 격파한 적도 있고 겨우 400명의 군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 10만명을 이틀 동안 꼼짝 못 하게 하고 수십만 백성을 피란시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홍양호(洪良浩)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 '정기룡은 크고 작은 60여 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탁월한 무장이었다. 또한 '정기룡이 가는 곳에는 백성이 한 명의 사상자도 없어 고을이 편안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라고 평할 만큼 전란의 시기에 목민관으로서도 뛰어난 행적을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육지의 이순신' '임란 60전 불패 신화의 영웅' '육군의 성웅' 이라 불렀다.

정기룡 장군은 1622년 2월28일,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다 61세로 경남 통영 진중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생전 어머니와의 약속에 따라 어머니의 묘소가 있고 자신이 목사로 근무했으며 상주성 탈환에 피를 흘렸던 상주에 묻혔다. 묘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가 있다. 충의사 유물 전시관에는 보물 제 699호로 지정된 교서 2점, 교지, 신패와 옥대 각 1점과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매헌실기 판목 58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정기룡 장군이 직접 사용했다는 검도 볼 수 있다. 전시관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장군의 초상과 마주한다. 장군의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 상주시. 임란북천전적지. 충의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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