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밤의 카페에서 혼자

  • 임수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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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29  |  수정 2023-05-29 07:40  |  발행일 2023-05-29 제14면

[문화산책] 밤의 카페에서 혼자
임수현〈시인〉

마감이 다가오는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노트북을 켜자 흰 화면이 내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자! 이제 뭐라도 써 보시죠. 커서가 깜박거린다. 그러게 말입니다. 뭘 써야 할까요? 마감이 글 쓰게 한다는데 아직 나에게는 하루가 남았으니, 너무 재촉하지 마시죠. 여기까지 적고 나니 삼일 문고에서 하는 '치유를 위한 글쓰기'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 전 쓸 게 없어요.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때마다 "쓸 게 없는 걸 쓰면 되겠네요" 한다. 그러면 반은 웃고 반은 당신도 좀 써 보시죠 하는 눈치다. 안다. 말이 그렇지 글쓰기의 막막함을 나인들 모를까. 창밖만 쳐다보다 노트북을 접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나도 많다.

어쩌면 오늘도 나는 글을 쓰지 못하고 카페를 나설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아 노트북을 접을 때쯤 옜다! 하고 한 문장을 불러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 기대를 하며 나는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 이상하게도 끝없이 막막하다가도 뭔가를 써 내려갈 때가 있으니 좀 일찍 찾아와 주면 어디가 덧나나 싶기도 하다.

오늘 내로 안 쓰면 총살하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니다. 막막함을 견디다 보면 생각지 않은 월척을 낚기도 하니 강태공의 요행을 바라게 된다. 차라리 어떤 날은 옆에서 총이라도 겨눠 줬으면 싶을 때도 있다. 부들부들 떨며 쓰는 글은 또 어떤 글이 나올까. 그걸 상상하니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생각난다. 2차 대전 당시 암호 해독가로 활약했던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암호를 사랑한 수학자 역으로 나온다. 그의 열정과 희생 덕분에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도 끝끝내 자신의 삶은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나라를 구할 것도 아니고 끝내 나를 구원할 것 같지도 않다. 어깨의 힘을 빼고 커서를 따라 여기까지 썼다.

카페 마감이 끝나가는지 아르바이트생이 창가부터 내 쪽으로 점점 밀대를 앞세우고 온다. '이봐요! 아직도 못 썼었어요. 인제 그만 가시죠. 여기도 마감해야 하니.' 밀대가 말하는 것 같다. 아르바이트생은 밀대를 세워놓고 테이블 아래로 의자를 밀어 넣는다. '조금만 더 쓰면 끝날 거 같으니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거의 다 되었어요.' 밀대가 다가오고 있다. 카페 바닥이 물기로 반들반들하다.임수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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