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긴 팔을 남기고

  • 임수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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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9  |  수정 2023-06-19 08:44  |  발행일 2023-06-19 제19면

[문화산책] 긴 팔을 남기고
임수현 <시인>

새벽 2시40분! 한 편의 글과 "보내보라고 하셔서…" 문자가 찍혀 있었다. 누구지? 이름을 봤더니 얼마 전 글쓰기 수업에 왔던 남자분이라는 걸 알았다. e메일은 알려주지만,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내가 그날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전화번호를 책 뒤편에 적어줬다. "작품 쓰면 보내보세요!" 말을 덧붙이며. 보내온 글은 소설이라기엔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자세한 합평은 뒤로하고 계속 써 보라는 응원의 말로 마무리했다.

가끔 시 쓰기 강의를 하게 되는데, 강의 전 담당자가 "작가님, 잘 썼다. 좋다!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안 좋은 걸 어떻게 좋다고 하고, 잘 쓰지 못했는데 어떻게 잘 썼다고 해요." 나는 담당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짧게는 몇 주차 하는 시 수업에 뭐 그리 진지할 것이냐, 좋은 게 좋다고 써 온 사람 기분 구길 일도 없고, '너는 그럼 얼마나 잘 쓰는지 보자!' 같은 말을 들을 이유도 없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마음을 다잡고 수업에 들어가지만, 그게 쉽지 않다. 시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해도 최소한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실제로 내게 원고를 던지듯(내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놓으며 오늘까지만 쓰고 시 못 쓰겠다는 분을 만났다. "세상에 우리가 시를 안 쓴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으므로 걱정 붙들어 매시라" 말하고 싶었지만, 새벽에 톡으로 작품을 보내는 사람의 마음도 알 것 같고, 시를 더 못 쓰겠다는 사람의 마음도, 그걸 출력해서 밑줄 그으며 첨삭하는 내 마음도 알 것 같다. 귀인까지는 아니어도 "운"이 되어주고 싶었다. 난간에 매달린 손을 잡아 무사히 이곳으로 건너오게 하고 싶었다. 내가 난간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있었을 때, 긴 팔을 뻗어 "이거 잡아!"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시절 나는 조금 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어느 사람의 팔을 잡고 거길 건너왔는지도 모르겠다. 반대편에서 내 "운" 이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내 팔을 더듬어 보곤 한다. 남들이 오지랖이라고 해도, 너나 잘하라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해도, 나는 아무래도 팔을 계속 내밀 것 같다.

임수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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