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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살로메 소설가 |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게 뭔데?" 습작품뿐만 아니라 유명 문학작품을 대할 때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문학의 본질이 예술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의문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에 속할 것이다. 예술의 궁극적 지향점은 메시지나 주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 즉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예술의 주제도 크게 보면 몇몇 어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소통, 부조리, 좌절, 희망 등등 몇십 개의 단어만 활용해도 웬만한 문학작품의 그럴듯한 메시지를 직조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묘파하는 일련의 작업을 그처럼 단순한 몇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다. 메시지나 주제로만 그 작품을 판단하는 순간 본래의 문학과는 한참 멀어지고 만다. 살아가는 데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인데, 어떻게 문학에서 똑 떨어지는 주제나 메시지를 찾으란 말인가. 단편적 상황에서는 정답이 있을 수 있지만, 긴 인생에는 결코 한 줄로 낼 수 있는 답이란 게 없지 않은가.
예술 영역 중에 문학만큼 인간 마음을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다루는 분야도 없다. 복잡다단한 사람 마음을 읽는 데는 주제나 메시지보다 인물과 플롯이 우선한다. 인물과 플롯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면, 그것에서 무엇을 취할 것인가는 독자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문학작품 앞에서 이미지나 개인적 감흥보다 메시지나 주제를 앞세워 왔다. 우리 교육의 단점과 무관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일단 책을 읽으면 느낀 점이나 교훈 찾기 등을 강조해 왔고, 그것이 입시로 연결되면서 주제 없는 문학작품 감상은 무소용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문학에서 '주제 찾기 지옥'을 탈출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문학적 글쓰기에 메시지가 명확할 필요는 없다. 교훈은 선전 문구나 캠페인이 담당하면 되고, 직설적 의도는 비문학적 언술로도 충분하다. 의도나 당위를 예고할수록 문학은 점점 어려워진다. 인간의 마음이 한 갈래의 길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 여러 해석이 가능한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 아닐 수는 있지만 문학적 작품이 될 수는 있다. 정답을 제시해서 감동을 유도하는 것보다 여러 길을 보여줌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오래 남는다. 문학의 제일 목표는 재미와 개인적 의미 부여이지 메시지 제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주제가 뚜렷한 논술문이 아니라 한 편의 긴 시와 같다. 삶 자체가 문학인데 어찌 한 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단 말인가. 창작으로서의 문학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메시지가 강할수록 공감과는 멀어진다. 문학의 출발 신호는 누가 뭐래도 불온함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 의문을 지니는 불온한 자들의 언어 모음이 문학예술이다. 문학은 문체와 구성으로 인간의 다면성을 견주고 어루만진다. 작가들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코드로써 언어를 선택한 것이지, 메시지를 의도하고 언어를 배치하지는 않는다. 그건 불온함이 아니라 불순함이다. 불순한 의도는 정답을 제시하고 강요하지만 불온한 작품에는 질문과 고민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이 작품을 어떤 의도로 썼나요 라고 묻는 독자에게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작가가 진정한 예술가라는 말에 동의한다. 문학의 본질은 인간탐구이다.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인간의 마음엔 답보다 질문이 많다. 대중극에서 추구하는 단 하나의 결말이나 주제 같은 게 문학에는 있을 수 없다. 죽음이라는 진짜 결말이 오기 전까지 정답보다는 훨씬 많은 질문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그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김살로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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