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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영 DGIST 에너지공학과 교수 |
많은 이들이 인지하다시피 지난 세기부터 인류의 문명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분명히 기술적으로는 어느 세기의 삶보다 더 편해졌다. 덕분에 우리는 더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지만, 종종 그러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개인용 컴퓨터가 나오고, 인터넷이 보편화되며, 많은 프로그램이 일상을 대체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그러한 기술적 혁신이 더 작은 스마트폰 내에서 구현되어 손바닥 안에 들어왔을 때, 많은 이들이 열광하였다. 더 빠르고 편안한 자동차가 자율 주행기능까지 탑재하여 목적지까지 간다. 고되고 시간이 많이 걸리던 가사 노동도 고성능의 생활 가전들이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분명히 기술의 발전대로라면, 과거에 비해 우리는 더 편하게 살아야 하지만, 시간의 노예로 더 초조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기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상 공간과 기능들 덕분에 여러 가지 감정의 소모와 혼란을 겪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시장 논리와 결합하여 과도하게 적용된 기술을 모르던 시절보다 훨씬 여유롭거나 풍요롭다는 마음은 그리 들지 않는다.
또한 인터넷과 가상공간 등을 통해 공유되는 많은 정보가 점점 인위적으로 가공되다 보니, 사람들은 실체와 허상을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듯하다. 빠르게 클릭해서 뭔가를 알아내는 게 익숙하다 보니, 몇 초조차도 길게 느끼고 답답하게 받아들인다. 더 효과적인 기술의 발전은 분명 인간을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우리를 병들게 만들고 있다. 가상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허상을 만들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허상을 완전한 실상으로 착각하면서 박탈감을 느낀다. 모르고 살 때는 쉽게 마음을 다스리고 평화로움을 찾았지만,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접하는 무수히 많은 정보와 타인의 삶은 오히려 현대인의 정서적 불안을 촉발한다. 여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정서는 실제 사회에서의 예의조차도 붕괴시키고 정신적 혼란도 유발한다. 솔직히 이러한 기술의 발전에 자본의 깊은 이해 관계가 끼어 있기에 많은 불편한 것들이 통제되지 않는 것이 사실 아닌가.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동안, 이에 상응하는 우리의 사회적 제도와 대응 방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은 이러한 간극을 채우기 어려운 현실과 맞서야 한다. 많은 초등학생이 이미 스마트폰을 쓰고, 여러 가지 온라인 환경에 노출되며, 익명성을 바탕으로 무분별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를 적절하게 교육하기 어려운 상황에 방치되어 있는 현실이다. 피폐한 자본은 오히려 이를 악용해 부를 불리려고만 한다. 인간 관계와 사회 활동의 방식이 급변한 지금, 그것을 대하는 교육 역시 발맞춰 발전해야 하지만, 예절과 인성 교육은 기술적 변별력에 함몰되어 등한시되고, 교육을 주도해야 할 교권은 붕괴되고 있으니 참담할 지경이다. 참교육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수능 시험에 킬러문항이 있어야 변별력이 있다는 기술적인 접근이 더 큰소리를 내는 현실이 안타깝다. 불행히도 자본이 움직이는 사회는 교육조차도 산업으로 만들고 있다. 예절과 인성이라는 측정하기 어려운 요소는 산업 모델로 적절하지 않은가 보다. 과도하기 짝이 없는 기술적 선행학습보다는 건강한 영혼을 배양하는 환경이 우선되어야 지금 우리 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심각한 간극의 문제를 예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박치영 DGIST 에너지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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