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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
기자가 물었다. "석방됐군요, 꼭 가야 합니까". 그가 답했다. "내 조국 공화국으로 돌아가야지요". 2000년 김대중 정권 시절 간첩 혐의 혹은 공산주의에 투신했던 장기복역수 63명이 북한으로 송환됐다. 대구교도소에서 풀려난 그는 단호했다. 북한을 조국으로 불렀다. 젊은 투사는 노인이 됐지만, 이념은 세월의 흐름도 멈추게 했다.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이념은 무엇인가.
며칠 전 태영호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 단상에서 특유의 카랑한 목소리로 발언했다. 그는 북한의 엘리트 외교관 출신으로 망명했다. 몇 년 전 대구에서 본 적이 있는 데다 나와 비슷한 또래라 그의 인생역정에 흥미가 있어 왔다. 태 의원은 "문재인 민주당 정권이 북한의 인권에 대해 완전히 태만했다"고 공격했다. 그러자 야당 석에서 '쓰레기'라는 야유가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후 발언은 자주 이념논쟁을 불러왔다. 대통령 발언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전체주의적 선동 세력, 반(反)국가 세력이 있다는 것이고 역사와 진실을 왜곡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윤 대통령이 앞세우는 이념의 실체는 '자유민주주의'다. 야당은 발끈했다. 느닷없는 이념논쟁이냐는 반박이다. 과연 그런가.
이념, 영어로 이데올로기(Ideology)는 '신념체계'로 정의된다. 정치철학이자 가치관, 세계관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사물과 역사를 보는 관념 체계이다. 영국과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쿠바혁명, 중국의 대장정 통일까지 근세 인간역사를 흔들었다.
다니엘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통해 2차대전 후 과학과 실용기술의 진보는 교조적(敎條的) 이념 갈등의 종식을 가져왔다고 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한발 더 나아갔다. 소련의 붕괴에서 보듯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승리했고 이는 역사적 최종 승리라고 단언했다.
대한민국은 역사의 최종 승리 속에 살고 있는가. 후쿠야마가 역사의 승리를 논거하면서도 평양만이 예외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결코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우리는 엄연히 공산전체주의 북한을 한 핏줄로 머리에 이고 있다. 북한에 친밀하다는 친북(親北), 따른다는 종북(從北)도 부인하기 어려운 실체다. 역사는 종언되지도 않았고, 농도는 다를지 몰라도 진영의 이념은 격돌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에서 같은 사안을 놓고 정반대 해석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미군 장갑차에 치인 효순·미순양 사건에서부터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광우병 논란, 후쿠시마 원전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미국을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보느냐, 일본을 여전히 항일투쟁해야 할 군국 파시즘 국가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홍범도 장군 흉상의 육사 교정 방출이나 광주의 정율성 기념사업도 이념의 궤도에 머문 사안들이다. 과거 대학 캠퍼스는 이념 학습의 장(場)이었고, 그들 세대는 현재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있다. 태영호를 쓰레기로 야유한 국회의원도 학생 운동권 출신이다. 북한이 태 의원을 쓰레기란 용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린 민주주의와 역사 교육이 어물쩍 넘어간 흔적을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은 결여돼 있고, 안타깝게도 종언을 고해야 할 이념은 살아 있다. 크게 보면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이념을 갖고 있을 게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차라리 격한 토론이다.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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