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따라 이야기 따라 영양에 취하다 .8] 영양의 석탑들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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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05 07:32  |  수정 2023-10-05 07:34  |  발행일 2023-10-05 제13면
절집은 간데없고 들판서 홀로 인고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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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의 반변천 변에 자리한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해체되고 연구되고 복원된 유일한 탑이다.

탑은 묘였다. 석가모니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이었다. 불상은 더 많은 대중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나타났다. 절집은 탑과 불상을 위해, 그것에 예배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절집이 사라진 탑, 절집보다 작아진 탑, 논 가운데 혼자 서있는 탑, 마을의 한가운데서 집들에 둘러싸인 탑, 천변의 풀밭에서 나날이 늙어가는 탑에서 보이는 것은 탑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한 기원, 지극한 정성, 무수한 발자국 소리다. 그것은 살아있었던 사람들의 것이고, 현재적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오래된 호흡이며,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하나의 증여가 되어 돌아오는 현재다.

국보 187호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조성 추정

보물 610호 현리삼층석탑 9세기 건립
12지신상·8부중상·사천왕상 등 새겨
현리 모전석탑, 감실 당초문양 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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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현리 삼층석탑

◆ 입암면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신구리 삼층석탑, 신사리 석탑

첩첩으로 둘러싼 검푸른 산들은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장엄하다. 소리도 없이 흐르는 강물은 소쇄하고 물가의 대지는 텅 비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 국보 187호인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이 자리한다. 진입하면서 바라보면 자연의 스케일 때문에 그리 크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탑의 위용은 압도적이다. 산과 물과 대지로 둘러싸인 고요한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듯 팽팽하고 조밀한 시선이다. 바람마저도 저 시선의 언저리를 맴돌다 떠날 것 같다.

산과 물의 골짜기라는 산해리의 반변천 변이다. 마을 이름이 봉감(鳳甘)이어서 이 탑은 오래전부터 봉감탑이라 불렸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모전석탑과 전탑 대부분이 긴 시간 동안 파손되고 결실되어 그 원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참 귀하다. 무엇보다도 이 탑은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해체되고 연구되고 복원된 유일한 탑이라 한다. 탑은 굉장히 크다. 높이는 11.3m, 초층의 너비는 3m가 넘는다. 토석을 섞어 만든 단층기단 위에 2단의 탑신 받침을 쌓고 수성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다. 1층의 탑신에는 화강암 테두리의 문이 남쪽으로 열려 있다. 속은 어두워 보이지 않지만 직사각형의 방이라 한다. 사리함이 있었을 듯한데 함의 조각만 발견되었을 뿐 사리구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석탑 주변에서 기왓장과 청자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 저 모전석탑의 규모에 맞는 큰 절집이 있었을 법하나 그에 대한 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반변천 물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오르면 입암면 소재지인 신구리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84호인 '영양 신구리 삼층석탑'이 자리한다. 조금은 한산한 신구2리의 마을 안, 조선 중기에 지어진 약산당 바로 앞이다. 2층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소박한 모습으로 신라 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1층 탑신석 상부에는 직사각형 사리공이 있었으나 사리 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옆에는 마멸이 심한 불상 하나가 앉아 있다. 작고, 훼손이 심한 데다 보수의 흔적마저 보인다. 석탑과 석불좌상은 마치 보리수 아래의 싯다르타 같다. 반변천 서편 신사리 새골마을 입구에도 작은 석탑이 있다. 그저 '영양 신사리 석탑'이라고 불리는 이 탑은 훼손된 탑신부 부재들을 이리저리 쌓아 놓아 간신히 돌탑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고 건립 연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새골은 고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배산인 부용봉에는 산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석탑은 마을의 선두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제 모습은 잃었지만 여전히 강건해 보인다. 흩어진 부재를 수습해 쌓아 올린 이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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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삼지리 모전석탑

◆ 영양읍 현리 오층모전석탑, 현리 삼층석탑, 화천동 삼층석탑

반변천을 거슬러 올라 영양 읍내로 들어서기 직전에 현리라는 마을이 있다. 원래 영양현의 읍치였던 곳으로 예전에는 현동이라 불렀다. 천의 남쪽은 현2리, 북쪽은 현1리다. 현2리 반변천 변에 오층의 모전석탑이 자리한다. '영양 현리 오층모전석탑'이다.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축조한 이 탑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서리 돌들이 둥글고 부드러워 시간의 흔적이려니 했는데 그리 치석한 것이라 한다. 1층의 탑신 남쪽에 감실이 있고 안에는 최근에 모신 듯한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감실의 문설주에 새겨져 있는 당초문양이 특이하다. 일제 강점기 때는 4층 일부까지 남아 있었다 한다. 이후 2층까지만 남아 있던 것을 1979년경에 5층으로 복원했다. 해체복원과정에서 일부 변형되었지만 봉감탑과 같은 재료를 사용했고 같은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최근 보물 2천69호로 지정됐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인 영성사(永成寺)가 이 탑을 지키고 있다.

현리 오층모전석탑에서 반변천 너머 들판을 바라보면 영양로 고가도로의 다리 사이로 쓸쓸하게 서 있는 삼층석탑이 보인다. 보물 610호인 '영양 현리 삼층석탑'이다. 탑의 높이는 4.27m로 아담하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아래층 기단에는 12지신상, 위층 기단에는 8부중상, 1층 탑신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층석탑에서 150여m 떨어진 곳에는 2.1m 높이의 당간지주가 하나 서 있다. 둘이어야 하는데 하나다. 장대를 꽂는 구멍이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깊게 파였다. 주변에 신라와 고려 시대의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저 너른 들판이 옛 절집의 규모를 상상케 한다.

현리의 동쪽으로 반변천의 지류인 화원천을 따라가면 대천리 지나 화천리다.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물이 화원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천 따라 200여m를 들어가면 몇 채의 민가에 둘러싸인 삼층석탑이 있다. 보물 609호인 '영양 화천리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현리 삼층석탑과 '쌍둥이 탑'으로 불린다. 축조연대와 조각장식, 전체적인 모양 등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한 석공의 손에서 두 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화천리는 영양읍에서 영덕으로 가는 길가의 마을이다. 고개를 넘어 고을과 고을을 오가던 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이 탑 앞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이 발밑에 악귀를 꽉 딛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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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현리 오층모전석탑

◆ 영양읍 삼지리 모전석탑과 일월면 용화리 삼층석탑

영양읍 북쪽에 삼지리가 있다. 세 개의 연못이 있어 '삼지'다. 아주 오래전 연못은 반변천이었으나 어느 날 천지가 변하여 못이 되었고, 또 어느 날 못에는 연꽃이 피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중턱에 신라 시대 고찰인 영혈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절집은 400여 년 전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연대암이 들어섰다.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사월(沙月) 조임(趙任)이 임진왜란 이후 지은 암자다. 암자 뒤편에는 자연 석굴이 있는데 '영혈(靈穴)'이라는 샘이 솟는다. 18세기 초의 기록에 따르면 영혈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영양의 진산인 일월산보다 먼저 제를 올리는 영험한 샘이었다고 한다. 암자의 오른쪽 절벽 끝 햇살이 스며드는 자리에 전탑이 서 있다. 과거 영혈사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 '삼지리 모전석탑'으로 불린다. 삼국통일 이전에 만들어진 호신불이라 하니 탑은 천년도 더 된 셈이다. 높이는 3.14m로 원래 3층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2층까지만 남아 있다. 1962년 탑을 수리할 때 감실 바닥에서 4좌의 금불동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1998년의 해체 보수 때는 석재 사리함과 사리 1과가 출토되었다. 탑은 오랜 세월 풍화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하지만 여전히 당당하다. 탑에서 연지가 내려다보인다. 연지에는 지금도 신라 시대의 연인 법수홍련이 피어난다.

이제 더욱 북쪽으로 거슬러 반변천이 시작되는 일월산으로 향한다. 일월산의 북쪽과 서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 반변천을 이루는 깊은 골짜기에 옛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용들이 모두 뜻을 이루어 하늘로 올라간 뒤 골짜기에는 용화사(龍化寺)라는 절이 지어졌다. 지금은 전설과 오래된 탑만이 남아 있는 그곳이 오늘날 일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마지막 마을인 '용화리'다. 탑은 길가의 밭 한가운데에 서 있다. '용화리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으로 네 개의 판석을 세워 조립한 기단석 위에 높이 3.41m로 올라 있다.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안정감 있는 단아한 모양이다. 용화리 삼층석탑을 떠올릴 때마다 푸른 밭의 가장자리에 나 있던 탑으로 가는 희미한 길이 떠오른다. 그 길에 서면 탑은 바다에서 솟은 듯했고, 마당 넉넉한 집에서 들려오던 고추 쏟아붓는 소리가 파도 소리 같았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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