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7> 6·25전쟁이 준 시련과 기회

  • 홍하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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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17 08:06  |  수정 2023-11-17 08:07  |  발행일 2023-11-17 제13면
숨어지내던 '빈털터리' 이병철, 운전기사가 구한 돈으로 겨우 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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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서울. <사진출처:미국 국립 아카이브>

1950년 2월, 이병철은 오랜만에 일본산업시찰을 나섰다. 도쿄는 그야말로 폐허였다. 공장 굴뚝 하나 남아있는 게 없었다. 머리가 심란하여 무심히 이발소에 들어갔다.

모리타 이발소. 이발소 주인과 얘기를 하다 보니 그럭저럭 3대째 60여 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발소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다. 그때 이병철은 이런 이발사가 있는 한 일본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 이발소는 아카사카의 바로 그 장소인 3정목 10-6에서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당시 이병철의 머리를 깎아주던 이발사의 아들이 주인이 되어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1950년 2월 당시 이병철의 머리를 깎아주던 사람은 모리타 쇼타로(森田正太郞)씨였다. 그는 8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가 은퇴했고, 지금은 아들인 제4대 모리타 야스히로(森田安弘·76)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모리타 쇼타로씨는 이병철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1950년 모리타 이발소를 처음 찾은 이후 작고하기 1년 전인 1986년까지 36년간 이병철은 일본에 오면 그 이발소를 찾았다.

오랫동안 단골손님이었기 때문에 이발사 모리타 쇼타로씨와 이병철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때로는 인삼 같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이병철은 86년 타계하기 1년 전쯤 마지막으로 그 이발소에 들러 이발사 쇼타료씨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그것은 독일의 헨켈에서 만든 명품 면도칼 세트였다. 그것이 이병철의 마지막 방문이었고, 이병철의 자서전도 후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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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상륙 중인 미군. <출처:미국 국립 아카이브>

◆6·25전쟁으로 낙향

일본에서 귀국한 지 불과 넉 달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이병철은 새벽 6시에 일어났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거기서 충격적인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으며 우리 국군은 이것을 격퇴 중이다.' 날벼락 같은 뉴스였다. 놀라운 마음에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국군병사를 가득 실은 트럭이 북쪽으로 수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국군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있으므로 시민들은 안심하라는 방송을 수시로 내보내고 있었다. 이병철은 라디오 방송을 믿고 곧 인민군이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라디오에서는 정부가 곧 수원으로 천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거리에는 피란 대열이 몰려나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병철은 종로2가의 삼성물산공사에 출근해서 간부들과 사태를 의논했다. 그러나 별다른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연락하자며 헤어졌다.

6·25전쟁 당일 아침 8시, 일본의 총리인 요시다 시게루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본 조야는 패전국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6월27일 밤이 되자 천지를 울리는 포성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이병철은 포성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고 나더니 거짓말처럼 포성이 한순간에 멎었다. 불안한 마음에 집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모든 전기가 끊겨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28일, 여명이 밝아왔다. 전차 바퀴 소리가 땅을 울리고 있었다. 혜화동 거리에는 인민군을 태운 전차가 인공기를 나부끼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서울은 인민군에게 접수되었다. 이병철은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6월29일쯤 되었을 때 인민위원회에서 공산당원이 찾아와 재산 상황과 사상에 대한 조사를 하고 갔다. 이어 내무서를 비롯한 각종 조사기관에서 그를 뻔질나게 조사했다.


서울에 있던 재산 인민군에 뺏기고
개인운전사 위대식 다락방서 은거
그가 인천서 돈 마련해 줘 대구로

전쟁폐허 속 고철 수집해 日 수출
일본서 번 달러로 설탕·비료 수입
1년 만에 재산 60억원으로 불어나



하루하루가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 사이 서울에 있던 이병철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다. 삼성물산 창고에 있던 물품은 증발되었다. 당시 삼성물산의 유일한 자산은 창고에 쌓아 놓았던 설탕, 알루미늄 괴, 면사, 한약재, 염료, 향료 등 수백 종의 물품이었다. 이것들은 6·25전쟁 직전에 수입한 것이었다. 당시 삼성물산공사는 이 물건들을 용산과 인천에 있는 보세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전쟁과 함께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이병철의 시보레 승용차도 빼앗겼다. 불과 한 달 전 미국대사가 타던 것을 산 것이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우연히 자신의 승용차가 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승용차 안에는 남로당 위원장인 박헌영이 타고 있었다. 적 치하에서 이병철은 결국 자신의 운전기사였던 위대식의 다락방에서 숨어지내게 된다.

"피란을 못 가고 적 치하에서 90일을 체험하고 보니 공산주의가 말로 듣던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때 자유민주주의와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전경련에서 행한 연설의 한 토막이다.

다락방에 숨어지낼 때 이병철을 충실하게 보필했던 사람이 있었다. 이병철의 자가용 운전기사였던 위대식이었다.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이병철에게 돈을 구해다 주었다. 자전거로 서울에서부터 인천까지 달려가서 인천에 있었던 삼성물산공사의 창고에 갔다. 당시 삼성물산공사의 창고는 인민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인민군에게 뇌물을 주고 약간의 물건을 빼낸 다음 그걸 팔아서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로 바꾼 후 그 돈을 이병철에게 가지고 왔다. 이병철은 위대식이 달러를 구해서 자신에게 줄 때마다 매우 야단을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해했다. 그때 위대식이 마련해온 돈은 빈털터리가 된 이병철 일가와 삼성물산공사의 임직원들이 피란갈 때 소중하게 쓰이게 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은 3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9·28 수복이 된 직후 공산당 치하에서 공포와 죽음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보았던 이병철은 한 대에 200만원씩 들여 5대의 트럭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 트럭에 가족과 직원들을 빼곡히 싣고 사흘이나 걸려 대구로 피란을 갔다. 모든 것이 압수된 상황에서 위대식이 구해온 달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위대식은 이병철의 운전기사 생활을 30년 이상 하게 되었고 훗날 삼성그룹 이사급의 대우를 받았다.

대구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이창업이었다. 이병철이 조선양조와 삼성상회의 경영을 이순근에게 맡겼으나 이순근은 그사이 월북했고 이창업이 조선양조와 삼성상회, 과수원의 경영을 맡고 있었다. 이창업은 청주 월계관과 삼성사이다를 출시해서 막대한 이윤을 내고 있었다.

이창업은 빈털터리로 내려온 이병철에게 이익금 3억원이 든 궤짝을 내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 3억원을 받아 든 이병철은 감격했다.

"사람을 썼으면 실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믿고 맡긴다." 그의 경영철학이 빛을 본 순간이다. 이병철은 3억원으로 새로운 사업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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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상륙 중인 일본 물자. <출처:일본 국립 아카이브>

◆이병철, 일본에 고철 팔아 재기

처음에 시작한 사업은 고철 수집이었다. 고철을 수집해서 일본에 팔았다. 포탄 껍데기에서부터 망가진 군용 차량과 그 부속, 폭격 맞은 공장 기계 등 고철 수집은 쉬웠다. 일본은 그 고철을 수입해 대포를 비롯한 각종 병장기를 제작해서 미군에 팔았다. 병장기뿐만 아니라 수입할 것이 많았다. 이른바 '조선동란 전쟁특수'이다.

당시 일본이 한반도의 미군에게 공급한 물품은 1위는 섬유 관련으로 마대, 담요, 면포, 의류, 2위는 트럭, 철도화차, 증기기관차 등 운수기계, 3위는 네이팜탄용 탱크, 연료탱크 등 금속제품이었다. 전쟁 시작 1년 차와 2년 차에 각각 3억달러가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요즘 돈으로 6천억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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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이병철은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홍콩으로부터 설탕과 비료를 수입했다. 전쟁 중이어서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설탕과 비료는 도착한 즉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달러만 있으면 물건을 더욱 더 많이 사들여 얼마든지 팔 수가 있었는데 달러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때 이병철에게 다시 한번 운이 뒤따른다. 전쟁 전에 홍콩에 수출했던 면실박 대금 3만달러가 거래선으로부터 도착한 것이다.

당시의 3만달러는 요즘의 3천만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말 한국이 보유한 달러는 총 2천680만달러였던 시절이다. 한국은 그 달러로 쌀, 밀가루, 보리, 비료, 설탕을 외국에서 구입하는 데 썼다. 그중에 쌀은 전체수입액의 14.2%로 가장 규모가 컸다. 그만큼 쌀이 부족했다. 설탕은 전체 수입액의 5.1%로 수입품목 제5위였고, 비료는 그보다 더 규모가 커서 전체수입액의 8.4%로 수입품목 중 4위였다.

이병철은 그 3만달러의 자금으로 더욱 더 많은 설탕과 비료 수입에 나섰다. 불과 6개월 만에 이익금이 10억원을 돌파했고, 1년이 지나자 재산은 무려 60억원으로 늘어났다. 다시 한번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이 생긴 것이었다. 60억원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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