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붉은귀거북

  • 오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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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6-17  |  수정 2024-06-17 10:39  |  발행일 2024-06-17 제22면
[취재수첩] 붉은귀거북
오주석기자〈경북부〉
이달 초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온 뒤 예식장 인근 수성못을 거닐다 우연히 그 녀석(?)을 만났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검푸른 등갑을 지닌 그 녀석은 물 위에 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다 이내 인기척을 느끼고 물속으로 숨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졸라 이 녀석을 키워봤던 기자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붉은귀거북'이다.

한때 애완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붉은귀거북은 주인에게 버려진 뒤 하천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비운의 생명체다. 강인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토대로 국내 생태계를 위협하자 정부는 2001년 붉은귀거북을 생태교란종으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퇴치 운동까지 펼쳤지만, 완전히 제거하진 못했다. 더욱이 붉은귀거북의 개체 수는 최근 늘어나는 실정이다.

국립생태원의 '2023년 외래생물 전국 서식 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경북에서 발견된 붉은귀거북 개체 수는 모두 342마리에 달한다. 이는 비슷한 장소에서 3년 전 실시한 조사 때보다 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대구에서도 수성못과 성당못 등 4곳에서 붉은귀거북 29마리가 발견된 것으로 집계됐다. 붉은귀거북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생태원은 왕성한 번식력을 꼽았다. 부화한 지 얼마 안 된 10㎝ 이하 개체가 복수 지점에서 발견된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붉은귀거북을 방생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경주시 양남면의 한 해변에서 붉은귀거북이 죽은 채 발견됐다는 민원이 접수됐다. 경주시 양남면은 국내 유일의 수중릉인 문무대왕릉과 인접한 곳이라 누군가의 방생이 의심된다. 기도발이 강하기로 유명한 문무대왕릉 일대 횟집에선 방생 물고기를 수시로 판매한다고 한다.

이렇게 방치된 붉은귀거북은 별다른 천적이 없이 국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유전자 변형으로 자연히 개체 수가 줄어든 황소개구리와 달리 붉은귀거북은 수년째 하천 생태계의 터줏대감을 자처하고 있다. 붉은귀거북의 등쌀에 밀려난 토종 민물 거북 '남생이'는 2005년 천연기념물에 지정되고, 현재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붉은귀거북의 확산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됐다. 책임감 없이 싫증이 난다고 버리거나 자신의 공덕을 쌓기 위해 방생했던 붉은귀거북이 되레 화가 돼 우리 하천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붉은귀거북을 보면서 마음 한편에 애잔한 감정이 드는 건 왜일까.오주석기자〈경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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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

영남일보 오주석 기자입니다. 경북경찰청과 경북도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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