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출신으로 수도권에서 활동중인 김숙애 전 대구가톨릭대 재경동창회장이 남다른 기부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숙애 강의실

김숙애 강의실 명판
2015년 건립된 대구가톨릭대 제2약학관은 미래의 약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공부하며, 꿈을 키우는 공간이다. 600여명의 약학대 동문과 교수들이 낸 발전기금으로 조성됐다. 연면적 1천322㎡인 제2약학관에는 고액 기부자의 이름을 딴 강의실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김숙애 강의실'이다. 동문 출신 약사로, 대구가톨릭대 재경동창회장을 역임한 김숙애 동문을 예우하며 조성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저는 평생 동안 유니폼을 입고 근무했기 때문에 명품을 사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제 경험상 돈쓰는 것도 일종의 연습인 것 같아요. 자꾸 써보니 나름 노하우도 생기거든요. 돈을 잘 쓰면 큰 힘을 발휘하지만 안쓰면 종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전쟁 중 전사한 아버지
김 전 회장은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 있는 향교와 수도산 사이에 있던 국군 관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령으로 있던 군인이었다. 김 전 회장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태어나 채 돌을 맞기도 전에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홀어머니, 언니와 함께 어려운 형편에서도 행복하게 성장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고통받았을 법하지만 구김살 없이 밝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 어느날 평생 잊히지 않을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교 3학년 때쯤이었다. 경기도 어딘가에서 육군사관학교 동기회가 열려 유가족 신분으로 참석했다. 맛있는 음식이 놓여 있고, 왁자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구김살 없이 밝고 착한 모범생 쯤으로 알려졌던 김 전 회장이 이날 만큼은 침울했다. 아버지가 있는 다른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을 보니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느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
김 전 회장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마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대성통곡을 했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그날의 이벤트(?)로 육사 동기생들의 장학금이 이날 이후로 풍족하게 이어졌다는 후문.
◇직원 15명 대형약국 운영
경북여고, 대구가톨릭대(옛 효성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됐다. 개업 초기에는 집 근처인 대구 대봉동에서 1인 약국으로 출발했다. 꾸준히 성장해 나중에는 직원이 무려 15명이나 되는 수도권 대형약국의 대표가 됐다.
“분당 서울대병원 근처에서 약국을 운영했는데,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어요. 간혹 환자들 중에는 거주지 근처에서 약을 사겠다고 그냥 귀가했다가 뒤늦게 약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동네 약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약들이 꽤 있거든요. 이럴 때 처방약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을 보면서 심야약국 운영을 시작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환자들에게 신뢰를 쌓으면서 약국운영이 더 잘됐던 것 같아요."
50여년 약사 한길만 걸어온 김 전 회장은 70세를 맞으며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약국만 지켜온 자신에게 '제2의 인생'를 주기로 한 것. 온종일 약국 일에 빠져 있다 보니 체력에 무리가 오고,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제가 하나에 빠지면 그거에만 몰두하는 성격이에요. 약국에 빠져서 평생을 그 일 하나로 지냈어요. 사람 같이 사는 게 아니었죠. 어느날 문득 이러다가 맨날 약만 팔다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을 살면서 정리 단계를 좀 가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빨리 그만둬야 되겠다 생각했고, 70세가 된 나를 위한 선물로 은퇴를 실행했어요."
◇“평생 한 번도 명품구입 안 해"
약국을 처분한 김 전 회장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실행하고 있는 중이다. 기독교인으로 교회 활동은 물론 미뤄둔 성경 공부에도 열심이다. 무엇보다 경북여고 재경동창회장, 대구가톨릭대 재경동창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재학생과 졸업생의 가교로 학교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약국을 그만두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발전적 일을 도모하고 싶었는데, 그때 딱 코로나가 왔어요. 경북여고 동창 모임을 하면 보통 1천명 이상이 모이는데, 코로나 때는 5명 이상 모일 수도 없었으니 난감했지요."
그때 그녀의 머리에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온라인을 활용해서 동창회 모임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온라인에도 새로운 세계가 있더군요. 대구와 서울, 해외에 있는 친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시간 가는 줄 몰랐죠. 사회에 작은 도움이나마 되자고 해서 보육시설 자립청소년 돕기 활동 같은 것들을 시작했죠. 코로나가 한창일 때는 여고 동문들이 고향 대구를 위해서 일주일 만에 8천만원의 성금을 모아 대구지역의 대학병원 네 곳에 급한대로 쓰시라고 나눠 보내기도 했어요. 이때 활동은 언론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고요."
◇“기부와 나눔 할 수 있어 감사"
약국을 은퇴한 이후 김 전 회장이 관심을 둔 분야는 '기부'와 '장학활동'이다. 그녀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장학금으로 공부했던 학창 시절의 경험이 있었다.
“비싼 학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도 많은데, 저는 장학금을 많이 받아서 공짜로 공부했어요. 국가에서 군경유자녀에게 주는 장학금, 미 8군 장교부인회, 육사를 나온 아버지의 동기들이 주는 장학금까지 충분히 감사한 일들이 많았죠. 받은 거는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전 회장은 작더라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덧붙인다.
“저는 평생동안 명품을 사본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평생 유니폼을 입고 근무했기 때문에 옷에 사치할 틈이 없었죠. 지금 제가 들고 있는 가방도 3만원 짜린데 가볍고 튼튼해서 제맘에 쏙 들어요. 사람들이 다들 좋은 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못 하잖아요. 사실 어떻게 보면 봉사에서 제일 쉬운 일이 돈을 내는 게 아닐까요? 정기적으로 시설을 찾아가 몸으로 봉사하는 분들에 비하면 말에요. 할 수 있을 때, 여건이 될 때까지 열심히 해볼렵니다."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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