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얼마 전, 고3 아들을 둔 어머니와 상담한 적이 있다. 아이는 매사에 의욕을 잃고, 집에 오면 말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다고 했다. 대화 중에 그 원인이 아버지와의 갈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목표를 정해놓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불도저형'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갈 때까지는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아야 해"라는 말을 습관처럼 반복할수록 아이는 더욱 말문을 닫고 가족과의 접촉도 꺼린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자주 집을 나가고 싶다고 해 불안하다고 했다. 이 사례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성공 중심' 교육관의 단면을 보여준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의 방식은 종종 성공이라는 결과에 종속되어 있다. 대부분 부모는 그들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아이를 밀어붙인다. 그러다 보면 아이가 보내는 정서적 신호는 놓치게 된다. 성과 중심의 양육 방식은 아이를 끊임없는 비교와 압박에 시달리게 한다.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때, 아이는 고립감과 자기 회의에 빠지게 된다. 소통이 끊긴 채 방치된 아이들은 혼란과 외로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대하소설 '티보가의 사람들' 제1부 '회색 노트'에 나오는 사춘기 소년 자크 티보는 우리 청소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크와 그의 친구 다니엘 드 퐁티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모와 학교, 종교적 권위에 억눌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다. 자크의 아버지는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체면에 부끄럽지 않은 '완성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믿는다. 그는 아이의 감정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자크는 소외감에 시달리며 점차 세상과 단절된다.
결국 자크와 다니엘은 집을 나간다. 그들이 도착한 해변은 상상했던 따뜻한 모래사장이 아닌, 날카로운 바위투성이 방파제였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는 것, 자유를 향한 갈망이 반드시 평탄한 길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자크는 외친다. "아아, 이 모든 것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절규는 청소년기의 고통이 단순한 탈선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임을 보여준다. 실패와 혼란 속에서 종종 왕성한 성장이 일어난다. 성장의 아픔을 기록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다시 일어선다.
청소년기의 방황은 흔히 문제 행동으로 오해받지만, 실은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나는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많은 부모는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이제는 다 컸다"라며 정서적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더 이상 애정 어린 손길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훈계와 통제, 지시와 평가로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이 시기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해와 지지가 필요하다. 부모의 무관심과 냉정한 태도가 아이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반복되는 비난이나 무시, 일방적인 충고는 아이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아이는 점차 마음의 문을 닫고, 혼자만의 세계에 머문다. 고립감이 깊어지면 우울함이나 불안, 대인기피로 이어질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훈계가 아닌 공감이다. 아이가 반항하거나 엉뚱한 말을 할 때, "그럴 수도 있겠구나", "네가 그렇게 느꼈구나", "아주 힘들었겠다" 같은 말이 혼란과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간다. 정서적으로 지지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 아이는 자신을 믿게 되고, 상황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된다.
아이를 통제하고 감시해 부모가 원하는 길로만 가게 하는 것은 좋은 양육이 아니다. 자녀 양육이란, 부모 역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혼란을 겪으며, 자녀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다. 부모와 자녀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와 다름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 틈을 줄이는 길은 사랑의 마음과 신뢰, 진심 어린 소통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헤쳐 나가야 할 미래는 부모가 걸어온 길보다 더 불확실하고 예측하기 어려우며, 험난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 결국 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온전히 독립할 때까지, 거리를 존중하며 함께 걸어가는 삶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아이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 기울였나?

김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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