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이 연출된 패션디자인. <출처: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홈페이지>
오늘날 패션계에서 소비자는 더 이상 단순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나타내고, 심지어 미술관에 전시될 것 같은 예술적 가치의 착장을 포용하기도 한다. 패션은 '디자인'으로 심미적, 상징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기능적이고 실용적 의미를 가지지만, 디자이너의 창의적 감성과 아이디어를 쏟아붓는 캔버스의 역할도 해왔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예술이 패션에 스며들었지만 그중 가장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예술 운동 중 하나는 팝아트(Pop art)이다.
팝아트는 엘리트주의에 도전하고 대중문화를 찬양한 시각적 혁명이다. 1950년대에 시작되어 1960년대에 정점을 이룬 팝아트는 일상생활, 미디어 아이콘, 소비재를 예술 표현의 정당한 소재로 재해석했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팝아트의 대담한 색채, 유쾌한 아이러니, 대중성은 현대 패션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창조와 해석을 완전히 뒤바꾼 개념미술의 선구자인 마르셀 뒤샹의 영향을 받아 1956년 영국의 예술가인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의 작품들이 팝아트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미술작품의 가치는 상하 계급 없이 동등하다는 개념으로 이미 존재하는 사물도 새로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보아 광고지를 오려붙인 콜라주 기법의 예술작품을 선보였다.

팝아트 모티브를 접목한 모스키노 패션쇼 의상. <출처: fashionado>
새로운 개념의 예술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주의에 대한 반항적인 예술적 반응으로 시작된 팝아트는 이제 패션 브랜드의 전략적 언어로 진화했다. 팝아트와 패션의 협업이 지속적으로 부활하는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 속 지속적인 이미지 창출과 소비, 그리고 디지털로 확장된 문화적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다. 루이비통, 디올 등 명품 브랜드부터 유니클로, H&M처럼 대중에게 친숙한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팝아트는 패션에서 시각적 어휘이자 주요 모티브가 됐다. 이러한 협업은 단순한 미적 도구를 넘어, 문화적 연대, 상업적 전략, 그리고 정체성의 표현이다.
1960년대에는 현대적 의미의 공식적인 패션 브랜드와 협업은 없었지만, 패션 디자이너들은 팝 아티스트들이 사용하는 대담한 색상, 상업적 이미지, 그리고 대중매체의 미학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피에르 가르댕, 파코 라반 등은 미래적이고 기하학적인 패션디자인에 팝적인 감성을 접목시켰고, 예술가인 쿠사마 야요이는 패션 관련 행사를 직접 기획하고 1968년 자신의 시그니처인 물방울 무늬와 사이키델릭 모티프가 담긴 의류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특히 팝아트를 대중화시킨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실크스크린과 캠벨 수프 캔을 포함한 작품은 의류, 액세서리, 패션 사진 등에서 끊임없이 디자인 원천으로 사용됐다.
예술과 패션의 시너지에서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2001년, 당시 루이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마크 제이콥스가 패션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인 스티븐 스프라우즈와 협업한 것이다. 이는 럭셔리 패션 업계에서 브랜드와 아티스트의 공식적인 협업이라는 의미가 크다. 워홀의 시각적 표현에서 영감받은 네온 컬러의 낙서적인 그래피티 컬렉션으로, 이 컬렉션은 럭셔리 브랜드가 스트리트(street) 감성의 예술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2003년 무라카미 다카시의 애니메이션에서 영감받은 팝아트를 루이비통 한 모델에 접목한 컬렉션이 탄생했다. 또한 도트 무늬로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야요이 쿠사마와 루이비통 협업은 가방, 의류 등 상품의 범위를 넘어 매장 디스플레이에 이르는 확장으로 쇼핑 공간을 몰입감 넘치는 예술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녀의 팝아트 작품은 패션에 대한 실험적 탐구로 의류 뿐만 아니라 패션공간으로 소비자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적 미학을 모스키노 패션에 재해석했고, 키스 해링과 장 미셸 바스키아아, 워홀의 작품은 티셔츠에 대량으로 프린트되어 예술로의 접근성이라는 무게를 낮추었다.

2024년 리바이벌한 마크 제이콥스와 스테판 스프라우즈의 그래픽 패션제품. <출처: WWD>
팝아트가 패션계에서 오랫동안 매력적인 협업으로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시각적 충격과 문화적 매력과 재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독점적인 고급 예술이 아닌 디자인과 협업으로 대중이 참여하고 소비할 수 있는 팝아트의 매력은 패션디자인 모티브를 넘어 패션브랜드의 매력을 창출하고 애착성을 형성하는데 있을 것이다. 예술의 의도를 지나치게 상품화할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논란으로 시작된 팝아트가 패션과 협업을 통해 논란을 계속 끌고가는 것 또한 그 유쾌함이 패션을 통해 사람들과 공유 범위를 넓혀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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