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원 신윤복(1758 ~ 1817)의 그림 '거문고 줄 고르는 여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대접을 받은, 선비의 반려 악기였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일상에서 거문고를 즐긴 흔적도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여성작가 서영수합(徐令壽閤·1753~1823)은 대표적 사례다. 달성 서씨 집안의 서영수합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대 명문가의 아들 홍인모(1755~1812)와 결혼, 부창부수하며 문화예술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
여성은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환영을 받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도 일찍부터 재능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살림을 살며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도 책 읽기 취미를 즐기고, 차를 좋아해 가족 차회를 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일상에서 거문고를 즐겼던 것 같다. 그녀가 일상을 읊은 시를 보면 '흥이 나서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탄다(興到弄琴書)'라거나 '거문고 먼지 털어 흥겨움 돋우어 보네(逸興拂瑤琴)'라는 등의 구절이 나온다.
서영수합의 거문고 시
다음 시를 보면 그녀가 직접 거문고를 타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지방 근무지에 함께 머물면서 서울의 집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의 구절이다. '흥이 나서 널따란 바위에 앉아(乘興坐盤石)/ 내키는 대로 어린 물고기 헤아렸지(隨意數細魚)/ 거문고 타며 달빛 즐기자면(抱琴環弄月)/ 흰 구름 상 위의 책에 가득했었지(白雲滿床書)'. 집 마당 연못가의 너른 바위에 앉아 달빛 받으며 거문고를 타는 일상을 보여주는 시라 하겠다.
남편 홍인모는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며 차를 즐기는 아내의 능력과 정서를 아꼈다. 말년에는 자신이 지은 시에 화답할 사람이 없다며 아내에게 시 짓기를 권해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영수합은 여자가 글을 남겨 무엇을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시를 지어도 굳이 종이 위에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홍인모는 아들들에게 어머니의 시를 외어 적게 한 후 사후에 시집을 간행할 수 있게 했다.
서영수합의 시 몇 작품을 더 보자. '겨울밤 책을 읽으며(冬夜讀書)'이다. '맑고 깨끗한 거문고 소리 흐르고(淸切琴聲轉)/ 검푸른 칼 기운 아득한데(蒼茫劍氣虛)/ 한밤중 눈 속에 매화가지 비껴 있고(梅橫三夜雪)/ 달빛은 책상 위 책을 가만히 비추네(月照一牀書)/ 여린 불로 느긋이 차를 끓이고(細火烹茶緩)/ 술 데우자 은은한 향 넘치네(微香煖酒餘)/ 흐린 등불 걸린 오래된 벽으로(疎燈掛古壁)/ 반짝반짝 새벽빛이 서서히 찾아드네(耿耿曉光徐)'. 어느 겨울밤, 거문고를 타고 차와 술을 즐기며, 새벽까지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풍족한 사대부가 부인의 고급스런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시다.
다음은 '송인(送人)'이라는 시다. '그대 보낼 때 푸른 산엔 노을 지더니(送客蒼山暮)/ 돌아오는 길엔 흰 구름이 누웠다(歸來白雲臥)/ 낡은 벽엔 거문고가 있건만(古壁有鳴琴)/ 솔바람만 때로 저 홀로 지나갈 뿐(松風時自過)'.
남편의 권유로 시작(詩作) 활동
서영수합의 아버지는 달성서씨 서형수(徐逈修·1725~1779)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집안 학풍은 실사구시의 실학을 추구했다. 영수합은 다섯 형제 중 외동딸이었다. 몸이 허약했지만 영민하고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영수합은 14세에 홍인모와 부부 인연을 맺었다. 오랫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한 남편과 지우 같은 관계를 유지했고 남편의 권유로 시도 지었다. 남편 홍인모는 호조참의와 우부승지를 지냈고, 그녀의 친정과 시가는 모두 당대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이런 가문의 전통 속에서 그는 유교적 윤리 관념을 체득한 전형적인 사대부가 부녀자였다.
영수합은 여자가 붓을 잡고 종이를 대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러한 일들은 부인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글을 짓지 않았다. 그러나 시 짓기를 좋아했던 홍인모가 만년에 지방에 가 있을 때 더불어 시를 화답할 사람이 없자, 영수합에게 시 짓기를 강권하였다. 영수합이 시 짓는 법도 모른다며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남편이 준 당율시 한 권을 보고는 열흘이 안 되어 율시를 짓는 등 짓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영수합의 시작(詩作) 동기는 남편의 시우(詩友)가 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남편이 돌아간 후에는 결국 절필하고 다시는 시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영수합의 문집인 '영수합고(令壽閤稿)'는 남편 홍인모의 문집인 '족수당집(足睡堂集)' 뒤에 부록되어 있다. 한시 작품 115제 191수, 사(辭) 1편이 실려 있다. 영수합의 한시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차운시가 많다는 것이다. 한시 115편 중 약 90여 편이 차운시다. 이백, 두보, 왕유, 맹호연 등 중국 시인을 차운한 것이 반을 넘으며, 이들 중 두보를 차운한 것이 가장 많다. 차운(次韻)이란 자신이 즐겨 읽는 시의 시운(詩韻)을 본 따 시운을 맞추어 시를 쓰는 것을 말한다. 그녀가 차운해서 시를 지은 것은 부녀자의 직분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시작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영수합의 외조모 이씨는 영수합을 매우 사랑하면서도 항상 "문사에 능한 여자는 운명이 기박하다"며 글 배우는 것을 금해 제대로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시집 와서도 부모 형제와 말할 때가 아니면 문자에 관해 말한 적이 없어 시집 온 지 10년이 되도록 그녀가 글을 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영수합'은 남편이 지어준 당호이다. 3남 2녀를 둔 영수합은 자녀 교육에 큰 열정을 쏟았다. 학문과 역사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고, 밤마다 읽은 책들을 점검했다. 그 노력과 열정 덕분에 맏아들 홍석주는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대제학도 지냈다. 둘째 홍길주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문장으로 큰 이름을 남겼다. 막내아들 홍현주는 정조의 딸 숙선옹주와 결혼했고, 정약용과 교유하면서 학자로 대성했다. 장녀 홍원주는 '유한당(幽閒堂)'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이 되어 '유한당시집'을 남겼다.
'유한당시집'에 있는 아래 시는 영수합 가족이 함께 창작한 작품이다.'만나서 실컷 웃으며 떠들었고(홍인모)/ 단란하게 둘러앉아 밤새도록 술을 권했네(영수합)/붓을 휘둘러 시를 짓는데(영수합)/제때 못 지으면 벌주를 마신다(홍석주)/ 섬돌을 에워싼 훌륭한 자녀들이(홍석주)/ 진수성찬 갖추어 바치는구나(홍길주)/ 향기로운 차 끓었음에 시상이 넘쳐나고(홍길주)/ 맑은 거문고 곡조는 미인이 타는구나(홍원주)/ 흐뭇하고 흐뭇하여 참으로 즐거우니(홍원주)/ 가면 갈수록 재미에서 헤어날 수 없구나(홍현주)/ 일어나 하늘 보니 은하수가 기울었는데(홍현주)/ 달님에게 물어본다. 얼마나 즐거워 보였는지(홍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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