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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4] 소형모듈원자로(SMR)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속 '아이언맨'은 하늘을 날면서 강력한 광선을 쏘아대며 적을 무찌른다. 보통의 인간을 초능력자에 필적하는 존재로 바꿔주는 아이템은 바로 금속 슈트다. 영화 설정상 이 슈트 가슴에는 '아크 원자로'가 붙어있다.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개발한 초소형 원자로가 슈트의 에너지원인 것이다. 또 다른 영화 '터미네이터'에서도 미래에서 온 로봇이 초소형 핵 전지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초소형은 아니더라도 기존 대형 원전을 100분의 1 이하로 축소한 '작은 원전'이 세계적인 화두다. 이른바 SMR(소형모듈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이다. 세계는 현재 이상 기후와 에너지 위기돌파를 위한 대안으로 SMR를 주목하고 있다. 기존 원전에 비해 안전성, 경제성이 뛰어난 데다 활용성도 높아서다. 세계 각국이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만큼 SMR 상용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경북,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4편에서는 원자력 발전의 혁신이라 불리는 SMR를 소개한다. '전천후 원전' SMR기존 대형원전 100분의 1로 축소건설기간·비용 줄고 안전성 강화 수중 설치 등 지형적 한계도 없어 글로벌 SMR 시장 年 22% 성장2035년 최대 630조원 규모 전망◆원자력 발전의 미래 SMRSMR는 전기출력 300㎿e 이하의 소형원자로를 가리킨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원자력 발전을 전기출력 규모에 따라 대형(1천㎿e), 중형(300~700㎿e), 소형(300㎿e)으로 구분하고 있다. 소형 중에서는 세부적으로 20㎿e 이하를 초소형원자로(Micro-reactor)로 구분하기도 한다.SMR는 증기발생기, 냉각재 펌프, 가압기 등 주요 기기가 하나의 용기에 들어있다. 기존 대형 원전을 소형·단순화해 크기가 작다. 소형화된 원전은 다양한 장점을 지닌다.우선 대형 원전에 비해 건설 기간이 짧고, 건설공사 비용도 적은 편이다. 또 안정적으로 전기와 열을 공급하면서도 탄력적 출력 제어가 가능하다. 핵연료 농축도를 15~20% 수준으로 높이면, 10년 이상 운전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 대형원전보다 안전성도 뛰어나다. 출력이 적고 고유·피동 안전성이 높아 만일의 사태가 발생해도 영향이 제한적이다. 지하나 수중에 원자로 모듈을 배치할 수 있어 지진이나 쓰나미, 미사일 공격 등으로부터 위험도 적다.무엇보다 SMR는 대형 원전이 지어지기 어려운 곳에 건설이 가능하다. 공장에서 하나의 모듈로 제작돼 트럭이나 기차, 선박 등을 통해 원자로 부지로 옮겨 설치만 하면 된다. 육상, 극지대뿐만 아니라 해상부유식 원전이나 선박용 원자로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1기에서 10여 기까지 상황에 따라 필요한 전력만큼 모듈을 설치할 수 있어 활용도가 더욱 높다.그동안 경제적, 지리적 이유로 대형 원전을 건설할 수 없었던 국가나 지역에 도입이 가능한 셈이다. 원전 건설에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개발도상국이나 국토 면적이 넓지만, 인구밀도가 낮은 국가 등이 SMR 건설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SMR는 기존 노후화된 화력발전소 등을 대체하며 탄소 중립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세계 발전소(12만7천기)의 96.5%는 전기출력 300㎿e 이하의 소형이다. 이 가운데 30년 이상 운전한 화력발전소는 1만8천여 기에 달한다. 이런 화력발전소는 비슷한 전기출력을 가진 SMR로 대체가 가능하다. 조항진 포스텍 첨단원자력공학부 교수는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 등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양은 급증하고 있지만 탄소 배출 등 환경 규제는 강화되고 있다"며 "여기에다가 최근 에너지 안보 문제까지 겹쳐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SMR 개발은 새로운 트렌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용화 경쟁 '잰걸음'정부 '혁신형SMR' 개발 본격화2030년대 세계시장 진출 청사진경주에 SMR국가산업단지 조성지원센터·과학연구소 등도 구축기술 노하우 바탕 연구개발 견인◆불붙은 SMR 개발 경쟁앞으로 원자력 발전 산업은 SMR로 인해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세계경제포럼(WEF)은 2040년까지 SMR 시장이 연평균 22%씩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영국 국가원자력연구원(NNL)은 2035년 SMR 시장규모가 최대 630조원 규모에 이른다는 전망을 내놨다.이에 각국은 SMR 상용화를 위해 앞다퉈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미국만 해도 뉴스케일파워, 테라파워 등 6개 기업이 SMR 상용화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중이다.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캐나다 등은 정부 주도로 만든 기업을 통해 SMR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개발 중인 SMR만 70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SMR 상용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는 기업은 미국의 뉴스케일파워(NuScale Power)다. 뉴스케일파워는 전기출력 60㎿e인 SMR '뉴스케일'(NuScale)을 개발해 상용화 준비 중이다. 뉴스케일은 원자로 모듈을 여러 개 연결해 전기출력을 최대 720㎿e까지 늘릴 수 있다. 뉴스케일파워는 잇따른 투자 유치 성공과 미국 정부의 지원 덕에 2029년 준공을 목표로 미국 아이다호주(州)에 SMR 타운을 건설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들도 뉴스케일파워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다. 두산에너빌리티 1억4천만달러, 삼성물산 7천만달러, GS에너지 4천만달러 등이다. 한국 기업들이 보유한 뉴스케일파워 지분만 15%에 이를 정도다. 한국도 SMR 상용화를 위한 기술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기술개발사업'을 위해 올해부터 2028년까지 모두 3천992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기로 했다. 2030년대에 차세대 SMR 노형(경수로, 중수로 등 원자로의 종류)을 개발해 세계 SMR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이 목표다. 사실 한국은 소형원자로를 개발해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를 받은 원전 강국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일체형 다목적 'SMART(System-integranted Modular Advanced ReacTor) 원자로'를 개발해 2012년 7월 원자력안전위원회로부터 표준설계인가를 획득했다. SMART는 전기출력 100㎿e 이상인 소형원자로인데, 인구 10만명의 중소도시에 필요한 전기(약 10만㎾)와 깨끗한 물(하루 4만t)을 생산할 수 있다. 설계수명은 60년이다.SMART는 대형 국가 프로젝트로 연구·개발에만 17년이 걸렸다. 투입된 예산만 3천447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SMART는 표준설계인가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11년 동안 상용화는 되지 못했다.최근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난달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캐나다 앨버타주(州)와 SMART를 포함한 SMR를 앨버타주 탄소 감축에 활용하기로 상호협력 협약을 체결하며 수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것이다. 이번 협약은 앨버타주 오일샌드(지하에서 생성된 원유가 지표면까지 올라오다가 수분이 빠지며 굳은 것) 채굴 시설에 필요한 전력을 스마트를 통해 공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추진됐다. 양측은 이번 협약을 바탕으로 SMART 건설 타당성 등 필요한 정보를 사전에 공유할 계획이다.경주에 들어서는 SMR 국가산업단지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고 있다. 원자력 업계에서는 경주에 들어서는 SMR 산업단지와 SMR혁신 제조기술 지원센터, 문무대왕과학연구소 등 SMR 산업 인프라가 앞으로 국내 SMR 연구개발과 실증의 주도적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상익 한국원자력연구원 혁신원자력기반조성사업단장은 "현재까지는 미국이 SMR를 주도하는 것 같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원전을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결국 서플라이 체인(supply chain) 문제에 직면해 상용화까지는 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반면 한국은 꾸준히 대형 원전을 건설하며 각종 노하우가 쌓여있고 관련 업체들도 많이 존재한다. 뉴스케일파워가 한국 기업 투자를 받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결국 최종적으로 누가 먼저 SMR 상용화에 도달할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한국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글=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2023 국제원자력에너지산업전에 전시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일체형 다목적 'SMART원자로' 모형. 세계 각국은 이상 기후와 에너지 위기 돌파를 위한 대안으로 소형원자로를 주목하고 있다.중소형 원자로 안전성 검증 실험장치인 SMART-ITL의 모습. 〈한국원자력연구원 제공〉
2023.05.11
[정문태의 제3의 눈] 폭염, 버마 그리고 잔인한 5월…괴물 폭염보다 더 뜨거운…군부 독재 축출의 열망
44.6℃,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지난 타이의 딱주, 더 또렷이 말하자면 모에이강을 끼고 버마의 까렌주와 국경을 맞댄 매솟 언저리를 취재하면서 겪은 살인적인 폭염이었다. 타이 기상청 생기고 최고 기록이란다. 해마다 3~5월 건기면 늘 겪어온 40℃쯤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가만있어도 줄줄줄 땀이 흐르고 온몸이 축 처지는 것쯤이야 그렇다 치고, 이번엔 뇌가 아예 작동을 멈췄다. 30년 넘게 이 동네 살면서 폭염 면역성을 제법 키웠거니 했는데 웬걸, 일사병 문턱까지 다녀온 기분이고.내 기억엔 2016년 북부 매홍손의 44.5℃가 그동안 최고 기록 아니었던가 싶은데, 올핸 타이 전역이 달포째 40~44℃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시달려왔다. 지난주 방콕은 체감온도가 55℃까지 치솟았다며 난리쳤고.한데 이번 폭염은 타이만도 아니라고. 지난 4월부터 서쪽 파키스탄, 인디아, 방글라데시, 버마에서부터 동쪽 라오스, 베트남, 중국 남부,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온 천지가 40℃ 웃돌며 나라마다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고들. 이 '아시아 괴물 열파(monster Asian heatwave)'가 사라질 낌새도 없는 판에 전문가들은 서쪽 벵골만과 동쪽 필리핀해 사이에서 발생한 고기압대가 주범이니, 지구 온난화와 엘니뇨현상 탓이니 뻔한 말들만. 언제 지구 온난화, 엘니뇨가 이번처럼 기온을 급등시킨 적 있었던가! 이게 다가 아니다. 1990년부터 국제사회가 폭염으로 치른 비용이 6조달러, 우리 돈 7천800조원이란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 열만 더 뻗칠 수밖에. 참 큰일이다. 또렷한 원인도 뾰족한 처방전도 없는 폭염이 인류사적 문제로 성큼 다가온 마당에 언제까지 휴교니 재택근무니 야외활동 제한이니 따위, 기껏 증상 치료로 맞설 것인지.버마를 화두로 잡아놓고는 폭염 탓에 갓길로 새버렸다. 숨이 컥 막히고 답답한 건 폭염만도 아니다. 2021년 쿠데타 뒤부터 꽉 막힌 버마 정국도 마찬가지다. 으레 여기도 움직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헛발질들. 지난 4월24일 유엔 전 사무총장 반기문의 난데없는 버마 방문부터가 그랬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버마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린 민아웅흘라잉 국가통치평의회(SAC) 의장 초대를 덥석 받아 버마로 달려간 반기문은 "버마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으로 모든 정파가 건설적 대화로 시작하길 촉구한다. (나는) 버마 국민의 평화와 번영, 자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하나 마나 한 아리송한 말을 성명서랍시고 날렸다. 민주 진영에선 곧장 거북함을 쏟아냈다. 망명 민족통합정부(NUG) 대통령 권한대행 두와라시라는 "자국민에게 잔학 행위를 저지른 폭력 정권을 반기문이 국제무대에 홍보해 주는 꼴이다. 아주 비윤리적"이라며 타박했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케는 "2009년 유엔 사무총장 때도 반기문은 군부에 구걸하다시피 버마에 와서 아웅산 수찌도 못 만난 채 돌아갔다. 공식 직책도 아무 영향력도 없는 이가 왜 갑자기 나서나"며 불쾌함을 드러냈고. 아니나 다를까 군부는 반기문이 떠나는 25일 샨주의 병원 공습으로 화답했다. 같은 날, 4월25일 뉴델리에서는 버마 정국 해법을 놓고 버마, 인디아, 중국,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정부와 전문가란 이들이 비밀 회담을 열었다. 지난 3월13일 아세안이 줏대로 방콕에서 연 이른바 '트랙 1.5 다이얼로그(Track 1.5 Dialogue)'의 제2편이었다. 그러나 버마 시민이 전폭 지지하는 망명 민족통합정부가 빠진 이 '정체불명' 비밀 회담도 민주 진영에선 싸늘한 대접을 받았다. "우린 국제사회의 개입과 도움 마다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해법도 학살 군부가 아니라 버마 시민을 바탕 삼아야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민족통합정부 총리실 대변인 나이폰랏이 "그들만의 대화"라 불렀듯이. 실제로 트랙 1.5 다이얼로그는 정작 버마 정국의 가장 중요한 한 축인 민족통합정부를 뺀 반쪽짜리 회담이었다. 비록 뉴델리 회담이 앞으로 민족통합정부도 대화 파트너로 삼겠다는 뜻은 밝혔지만 굳이 비공개 비밀 회담이 왜 필요한지조차 의문스럽기만.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을 감춘다는 건 아세안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버마 군부 눈치만 살피고 결국 군부한테 승리를 안기겠다는 뜻이다." 카레니민족진보당(KNLA) 부의장 에이블 트윗 말 그대로다. 그동안 유엔도 아세안도 군부 입장을 좇는 말잔치뿐이었다. 이게 쿠데타 뒤 지난 2년 동안 버마 시민이 받은 배신감이었고.이제 현실 속에서 버마 시민사회의 폭발적 지지를 업은 민족통합정부가 빠진 버마 해법이란 건 없다. 민족통합정부는 2020년 11월 총선에서 뽑힌 상·하원 의원들이 2021년 2월1일 쿠데타에 맞서 결성한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를 굴대 삼아 정당, 시민단체, 소수민족이 함께 창설했다. 그게 2021년 4월16일이었다. 이어 타이와 국경을 맞댄 까렌민족연합(KNU)을 비롯한 소수민족무장조직 해방구로 숨어든 국민통합정부는 사제 무기를 들고 군부에 맞선 시민투쟁에 자극받아 5월5일 민중방위군(PDF) 창설로 반독재 무장투쟁을 선포했다.현재 민족통합정부는 3개 사령부 아래 200~500 병력을 지닌 221개 대대 6만5천을 이끌고 있다. 그 가운데 25%는 M-16을 비롯한 정규군 무기로, 40%는 무기제조창 70여 개에서 손수 만든 사제 무기로 몫몫이 무장했다. 단기간에 자력으로 이만한 시민 군사조직을 꾸렸다는 건 세계 혁명전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소수민족해방군 가운데 최대 화력을 지니고 62년째 버마 정부군과 싸워온 까친독립군(KIA) 병력이 2만인 사실과 견줘볼 만하다. 흔히들 무장조직 덩치를 총값으로 가늠한다. 예컨대 요즘 버마 국경으로 흘러가는 M-16 소총 한 자루가 암시장에서 4천~5천달러까지 치솟았다. 1만 병력을 무장하는 데 어림잡아 600억원이 드는 셈이다. 여기에 실탄과 군장과 전비까지 보태면 1인당 곱하기 3으로 친다. 그걸 지하 망명정부가 해냈다는 뜻이다. 이건 그동안 망명 지하 민족통합정부를 버마 안팎 시민사회가 인정했다는 증거다. 지하정부는 시민 기부금뿐 아니라 스프링혁명특별기금채권, 스프링복권, 가상화폐거래(NUG-Pay)를 통해 전비를 마련했다. 군사령관 민아웅흘라잉의 랭군 집을 비롯해 군부와 그 족벌의 불법 부동산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한 것도 지하정부의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였다."혁명채권이나 군부 소유 부동산 경매는 우리가 성공적으로 군부를 몰아낸 뒤 돌려줄 수 있는, 말하자면 미래를 담보한 불확실성에 투자한 셈이다. 게다가 330개 군구 가운데 우리 민중방위군이 점령한 48개 군구 시민이 군사정부 대신 민족통합정부에 자발적으로 250억짯(130억원) 세금까지 냈다. 이게 바로 우리 시민의 열망이다." 국경 은신처에서 처음 언론 앞에 얼굴을 내밀고 나와 마주 앉은 민족통합정부 기획·재무·투자부 장관 띤뚠나잉은 '시민의 열망'을 말하며 북받쳐 올랐다. 그렇게 버마 시민이 지하정부한테 모아준 돈이 1억달러, 우리돈 1천300억원이었다. 그 돈으로 지하 민족통합정부는 민중방위군에다 마을 단위로 조직한 민중방위팀(PDT) 250여 개까지 꾸려 학살 군부에 맞서왔다.민아웅흘라잉이 쿠데타로 버마를 뒤집어 놓은 지도 2년하고 석 달이 지났다. 그사이 긴가민가했던 망명 민족통합정부는 버마 시민사회의 반독재 민주화 열망을 안고 그 나름 자리 잡았다. 비록 민족통합정부가 소수민족해방군의 불신감을 오롯이 걷어내지 못했고 버마 안쪽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시민군과 연대투쟁에도 한계를 드러낸 건 사실이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대안임은 틀림없다. 이름마따나 이제 민족통합정부의 성패는 버마 시민과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통합에 달렸다. 현재 버마에는 학살 군인독재자와 민족통합정부, 그 둘뿐이다. 버마 시민도 세계시민사회도 달리 택할 길이 없다. 국제사회가 줏대 삼아야 할 대상도 오로지 하나뿐이다. 버마 정국 해법은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버마 시민의 열망이 그 답이다. 우리가 민족통합정부를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이다. 2년 넘도록 온 나라가 전쟁에 휘말린 버마, 시민 무장투쟁으론 30만 정규군을 거느린 61년 묵은 군인독재를 단기간에 몰아낼 수 없는 현실 그래서 땅거미 지는 버마를 바라보는 맘이 폭염만큼이나 괴로운지도 모르겠다. 〈방콕특파원·국제분쟁 전문기자〉버마 소수민족 반군 단체인 따앙민족해방군(TNLA) 대원 2천 여명이 북부 샨주의 숲속 베이스캠프에서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맨위·가운데) TNLA 대원들이 샨주의 남산(Namhsan) 거주지역 근처를 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버마 소수민족 반군 단체인 따앙민족해방군(TNLA) 대원 2천 여명이 북부 샨주의 숲속 베이스캠프에서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맨위·가운데) TNLA 대원들이 샨주의 남산(Namhsan) 거주지역 근처를 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버마 소수민족 반군 단체인 따앙민족해방군(TNLA) 대원 2천 여명이 북부 샨주의 숲속 베이스캠프에서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맨위·가운데) TNLA 대원들이 샨주의 남산(Namhsan) 거주지역 근처를 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3.05.10
[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3] 북천전투와 정기룡 장군
상주의 시가지 외곽을 따라 북천이 흐른다. 백두대간의 백학산과 윤지미산에서 발원해 병성천이 되었다가 낙동강이 되는 천이다. 북쪽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은 천봉산이고 남쪽에는 갑장산, 동쪽에는 병풍산, 서편에는 노음산이 의젓이 섰으니, 상주의 명산이 모두 모여 북천을 귀하게 감싸고 있다. 봄에는 벚꽃이 나리고 가을에는 낙엽이 흩어지고, 여름에는 물놀이장이 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된다. 또한 상주의 온갖 축제와 행사가 북천 변에서 열린다. 사계절 밤낮없이 북적대는 시민의 휴식처이자 놀이터가 바로 북천이다. 시간을 거슬러 1592년 4월25일, 천지에 꽃들이 하늘거렸거나 혹은 꽃샘추위가 저고리를 파고드는 그런 봄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 북천 변은 임진왜란의 전쟁터였고, 우리의 관군 60여 명과 의병으로 일어난 상주사람 800여 명이 모두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상주 북천전투와 임란북천전적지1592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군의 침략 사실을 접한 조선 조정은 4월17일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영남으로 급파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7천여 명의 왜 육군 1부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한 것은 4월23일이다. 상주성을 지켜야 할 상주 목사 김해는 벌써 도망쳐 버렸고 판관 권길이 상주를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판관을 시켜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게 하고 관아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어 군사를 모집했다. 이렇게 관군 60여 명과 급하게 모인 민병 800여 명으로 조선 최초의 주력 병력이 편성됐다. 대부분이 전투 경험이 없는 농민이었다. 북천 냇가에 진을 치고 훈련이 시작됐다. 이미 선산까지 진출해 있던 일본군은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 정찰하고 있었다. 24일 왜군은 상주의 남쪽 장천으로 진입했고, 25일 동트기 전의 새벽, 북천을 건넜다. 곧바로 왜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총부대의 일제사격에 조선의 기병들은 말을 탈 틈조차 없었다. 조선군의 화살은 왜군의 대열에 미치지도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순변사 이일은 단신으로 도망쳤다. 상주 판관 권길, 상주목 호장 박걸, 종사관 윤섬, 종사관 이경류, 종사관 박호, 사근도찰방 김종무, 의병장 김준신, 의병장 김일 등이 죽기로 맹세하고 싸웠으나 조선군은 결국 전원 산화하였다. 북천전투는 왜군에 대항해 우리 중앙군이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였다. 이 일을 안 선조는 상주 전역에 부역을 면제하는 복호(復戶)를 내렸고, 상주는 왕의 은전을 입은 우리나라 유일한 곳이 되었다.천봉산의 남쪽 자락 봉우리가 자산(子山)이다. 자산 아래 '임란북천전적지'가 있다. 찰랑거리는 푸른 북천이 곧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다. 기와를 얹은 돌담에 삼문이 높다. 전적지에는 북천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들과 북천 전투에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등이 고요히 자리해 있다.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에는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북천전투에서 전사한 종사관 윤섬·박호·이경류 3충신과 의병장 김준신·김일 2의사, 상주 판관 권길, 호장 박걸, 사근도찰방 김종무 그리고 순국무명열사 9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양력 6월4일에 제향하고 있다. 전적지 가운데에는 임란북천전적비가 우뚝 서 있는데 거기에는 북천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절창으로 새겨져 있다. '지금도 자산을 철환산이라고 하는데 비나리는 어스름 달밤에는 귀화가 흐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충의혼백이 슬프고 분한 원한을 품은 지 사백여 년 새와 짐승과 솔소리만이 그 넋을 위로하던 곳 이제 전적지로 지정 정화하여 역사와 충렬과 자위의 산교육의 터전으로 삼는 한편 충렬사를 세워 절개와 의리에 산 지휘관 및 이름조차 밝힐 길 없는 수많은 병졸의 영령을 위안하고 숭고한 호국의 뜻을 길이 빛내며 지난 일을 귀감 삼아 내일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운다.' ◆정기룡 장군의 상주읍성 탈환과 충의사 북천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장 도다 가츠타카(戶田勝隆)가 2천800여 병력을 거느리고 상주읍성에 주둔했다. 그즈음 정기룡(鄭起龍) 장군은 상주읍성 탈환의 임무를 띠고 갑장산 영수암에 도착한다. 장군은 불시에 속전속결로 상주읍성을 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1592년 11월23일 밤, 상주의 남쪽과 북쪽의 산 능선 가득 횃불이 타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부녀자들이 일제히 북과 징, 꽹과리를 치고 태평소와 나팔을 불어 굉음을 일으켰다. 읍성의 서북쪽 담벼락에 쌓아 놓은 관솔 횃불에도 일제히 불이 붙었다. 불길이 바람을 타고 올랐고 세찬 불꽃은 하늘까지 뻗쳐 너울거렸다. 자고 있던 일본군은 크게 당황했다. 사방에서 시뻘건 화염이 타오르는 가운데 온갖 풍물 소리가 귀를 찢고 혼을 흔들었다. 남북 먼 산마루에서부터 가까운 읍성 주변에 이르기까지 조선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의병과 백성들은 재빨리 남·서·북문에서 동시에 쳐들어갔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속수무책으로 흩어졌다. 일본군 100여 명이 왜장 도다 가츠타카를 호위하여 유일하게 불길이 없는 동문을 향해 달렸다. 그들이 동문을 나서는 순간 밤나무 숲에 매복했던 의병과 백성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박달나무 방망이를 휘둘렀다. 상주 의병과 백성은 완벽하게 승리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노약자와 부녀자가 절반이 넘는 상황에서 조총을 가진 일본군 수천 명을 전멸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후 정기룡은 6년 동안 상주를 거점으로 경상도를 굳건히 지켰다.북천은 시가지를 벗어나 병성천과 합류해 사벌면 금흔리 남쪽 자락을 적시며 낙동강으로 간다. 그곳 금흔리에 정기룡 장군의 무덤과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정기룡 장군은 1562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곤양(昆陽), 호는 매헌(梅軒)이다. 20세에 상주로 이사를 왔고, 25세에 무과에 급제해 신립(申砬) 휘하의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31세에 임란을 맞은 그는 거창, 금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상주성을 탈환하는 등 충청과 경상도를 오가는 전투에서 승리, 불과 1년 사이에 무려 10 품계나 뛰어올라 1593년 32세 때는 경상도 북부 28개 고을을 관장하는 상주 목사가 되었다. 선조는 "장군이 없었으면 영남을 잃었을 것이요, 영남을 잃었으면 나라를 잃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임진왜란 동안 장군은 크고 작은 전투를 60여 회나 치르면서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력으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50명의 기병으로 수천 명의 왜적을 격파한 적도 있고 겨우 400명의 군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적 10만명을 이틀 동안 꼼짝 못 하게 하고 수십만 백성을 피란시켜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홍양호(洪良浩)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서 '정기룡은 크고 작은 60여 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탁월한 무장이었다. 또한 '정기룡이 가는 곳에는 백성이 한 명의 사상자도 없어 고을이 편안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라고 평할 만큼 전란의 시기에 목민관으로서도 뛰어난 행적을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육지의 이순신' '임란 60전 불패 신화의 영웅' '육군의 성웅' 이라 불렀다. 정기룡 장군은 1622년 2월28일,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하다 61세로 경남 통영 진중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생전 어머니와의 약속에 따라 어머니의 묘소가 있고 자신이 목사로 근무했으며 상주성 탈환에 피를 흘렸던 상주에 묻혔다. 묘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가 있다. 충의사 유물 전시관에는 보물 제 699호로 지정된 교서 2점, 교지, 신패와 옥대 각 1점과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매헌실기 판목 58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정기룡 장군이 직접 사용했다는 검도 볼 수 있다. 전시관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장군의 초상과 마주한다. 장군의 시호는 충의(忠毅)이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상주시. 임란북천전적지. 충의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상주 시가지 외곽을 따라 흐르는 북천 뒤쪽으로 임란북천전적지가 보인다. 전적지에는 임란 당시 북천전투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들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등이 고요히 자리해 있다.상주경상감영공원에는 임란 당시 상주성 탈환에 성공한 정기룡 장군을 형상화한 동상과 기념탑이 서있다. 오른쪽은 정기룡 장군 묘소 입구에 위치한 신도비.상주경상감영공원에는 임란 당시 상주성 탈환에 성공한 정기룡 장군을 형상화한 동상과 기념탑이 서있다. 오른쪽은 정기룡 장군 묘소 입구에 위치한 신도비.
[대구의 뿌리, 문화 예술 중심지 달성 .4] 달성 문화예술 창작(상)…주민엔 문화 명소, 작가엔 창작 산실 '상생의 공간'
낡고 오래되어 제 역할을 잃어버린 도시의 쇠락한 장소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치환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고유의 장소성을 회복하려는 작업은 1990년대부터 이어져 온 세계적인 흐름이다. 특히 자치단체 주도의 도시재생 사업은 예술가에게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주민에게 문화적 혜택이 돌아가게 하며 도시 공간의 유기적 순환을 통해 지역 활성화 효과를 더불어 이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공간은 지역사회와 호흡을 같이한다는 특수성이 있으며 지역민이 생산 과정에 참여하고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이해되는 문화민주주의 이념과도 연관된다. 창작 공간의 존재론적 효과나 예술의 사회적 영향을 측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적 공간 확대를 위한 다양한 시도는 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신뢰와 옹호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뿌리에서 태어난 새로운 가치 공간 중 하나가 달천예술창작공간이다.금호강변 너른 들 바라보는 자리폐교 매입 창작공간으로 새 단장신진작가 역량 키우는 보금자리지역민 참여 프로그램도 꾸준히대구미술광장 등 운영 중단으로예술 통한 지역 활성화 이목집중◆달천예술창작공간달성 다사읍 달천리 박산 자락에 금호강변의 너른 들을 바라보며 서 있는 건물이 있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준 깔끔하고 반듯한 외관에 '달천예술창작공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름 그대로 달천마을에 자리한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이다. 2021년 4월에 문을 연 달천예술창작공간은 대구시 기초 자치단체 산하 문화재단 가운데 달성문화재단이 처음으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에게 창작을 위한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아가 시민에게는 문화예술 향유와 소통의 즐거움을 제공하여 지역의 문화명소로 만들어 가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첫눈에 저절로 정겨운 마음이 든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원래 초등학교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68년에 개교한 다사초등 달천분교였다. 1971년 달천초등으로 승격됐지만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서재초등 달천분교로 편입됐다가 1999년 9월에 결국 문을 닫았다. 이듬해 지역 미술인들은 폐교된 건물을 임대해 창작공간으로 활용했다. 개장 당시 박곡리의 '박' 자와 달천 분교의 '달' 자를 조합해 '박달예술인촌'이라 명명했다고 전한다. 서양화, 동양화, 조각, 디자인, 도예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인이 모여 전시 및 작업을 하던 박달예술인촌은 일반에게도 개방되어 있었고 매년 인근 주민들의 자녀를 위한 무료 미술학교도 열었다고 한다. 박달예술인촌의 자생적 문화예술 활동은 약 20년간 지속되었다. 이후 달천분교는 달성군이 부지와 시설을 매입하였고 새 단장을 거쳐 달천예술창작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달천예술창작공간은 2층 규모로 1층에는 상시 운영되는 전시실, 지역민과 방문객들을 위한 주민 활용 공간, 교육 및 체험프로그램 진행이 가능한 세미나실, 다용도실, 창고 등이 자리한다. 2층에는 입주 작가를 위한 스튜디오(1인실 4개·2인실 1개)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조각 등 대형작업을 할 수 있는 야외 공간도 마련돼 작가들에게 더욱 매력적이다.거주 시설과 작업 공간을 지원하는 레지던시(Residency)는 신진 작가들에게 '꿈의 공간'이라 할 만하다. 입주 작가로 선발되면 일정 기간 동안 작업실과 거주 공간 등이 확보되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으며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의 혜택도 누릴 수 있다. 달천예술창작공간 입주작가들에게는 10개월 동안 개별 스튜디오가 제공된다. 또한 프리뷰전, 개인전, 단체전, 교류전, 오픈스튜디오 등 프로그램 참여와 창작·활동지원금, 평론가 매칭, 홍보물 제작 등 작가로서의 창작 역량을 최대한 높이고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다양한 지원을 받는다. 일시적인 머무름이지만 젊은 작가들에게 레지던시 입주는 특별한 선물이자 기회인 것이다.올해는 기조(도예), 배지오(설치), 임지혜(평면), 전수현(설치), 최영지(평면), 최종열(미디어) 6명의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프리뷰전 '유난스러운 봄'은 오는 26일까지 1층 전시실에서 진행된다. 앞서 제1기 입주작가로 김도경(평면)·김소라(평면)·김조은(설치)·김현준(입체)·이민주(평면)·이지원(평면), 2기 작가로는 김재홍(평면)·박두리(평면)·박지훈(미디어)·배혜진(설치)·이숙현(미디어)·이승희(설치) 등이 선정돼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소화했다.현대미술에서 레지던시는 작가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창작의 산실인 레지던시는 지역사회와의 소통과 문화 활성화, 도시재생 기능, 국내외적 문화교류 역할도 한다. 창조와 재생 그리고 소통이라는 순환하는 가치의 영향력은 근래 더 주목받으면서 현대미술 생태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달천예술창작공간은 예술인과 지역민의 상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주민참여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예술인들의 네트워크 환경 조성을 위한 교류와 연계도 달천예술창작공간 운영의 핵심축이다. ◆달성 예술창작 공간의 흔적헐티재 아래 가창의 아름다운 정대리에는 고즈넉한 대구미술광장이 있다. 달천예술창작공간과 마찬가지로 1994년 폐교된 후 방치되어 있던 용계초등 정대분교를 리모델링하여 2000년에 문을 연 창작공간이다. 개관 당시에는 기성 예술가들에게 시설을 임대하여 창작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서양화, 동양화, 서예, 도예 등 사회교육 미술 교육원을 운영하는 지역의 문화센터로 기능했다. 2009년부터는 '대구미술광장 창작스튜디오'로 명칭을 변경하여 상대적으로 작업환경이 취약한 신진 작가들에게 활동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개별 작가의 작업 지원과 작업을 위한 환경을 지원하는 스튜디오 프로그램, 레지던시 교류전과 오픈 스튜디오, 개인 전시 및 단체 전시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 프로그램 그리고 국제적인 감각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 등을 지원했던 것. 하지만 수년 전 민간에 매각된 이후 현재는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가창의 삼산리에는 가창창작스튜디오가 있었다. 1949년에 개교한 가창초등 우록분교가 1994년 폐교되자 2007년 창작 스튜디오로 활용하자는 대구현대미술가협회의 제안을 대구시가 받아들여 설립된 청년 예술가 창작 레지던시였다. 가창창작스튜디오는 오픈 다음 해 '2008 미술창작스튜디오 네트워크전'을 통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다른 지역의 레지던시 벤치마킹 사례로 떠올랐다. 2009년부터는 '해외작가 초청 레지던시' 사업을 추진해 유럽, 미국, 중국, 아프리카 등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가창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15년가량 운영돼 오며 매년 10명 이상 모두 200여 명의 국내외 청년 작가를 양성, 배출해 젊은 작가들의 역량을 키우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가창창작스튜디오는 올해 초 15년 만에 운영을 중단했다. 지난해 대구시교육청이 우록분교 매각을 결정하면서 공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아쉬움과 함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의견도 있다. 여러 대안이 검토되고 있는 가운데 달천예술창작공간의 어깨는 조금 더 무거워진 듯하다. 출범 3년 차, 안정적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달천예술창작공간에 이목이 집중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참고= 대구의 뿌리 달성, 달성문화재단, 2014. 달성 대구현대미술제(http://www.dalseongart.com). 달성문화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달성 다사읍 달천리 박산 자락에 위치한 달천예술창작공간은 작가들에게 창작을 위한 공간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나아가 주민에게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와 소통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입주작가의 작품이 내걸린 1층 전시실 모습(위). 달천예술창작공간에는 전시실, 작가 스튜디오 외에도 일반인 대상 교육 및 체험프로그램 진행이 가능한 세미나실, 다용도실 등을 갖추고 있다.달천예술창작공간 야외에 설치된 김구림 작가의 작품 '음과 양. 22-S. 존재와 허상'.
2023.05.09
서문시장 '이전 100년' 다양한 사람의 삶이 녹아있는 곳…경제 발전과 아픔 모두 겪어
서문시장이 '이전 100년'을 맞이했다. 서문시장은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성장과 변화의 시기를 겪었다. 긴 역사인 만큼 서문시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다. 서문시장 속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관련 영상 바로가기 서문시장의 역사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초기 서문시장은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 잡은 조금만 향시(鄕市)였다. 이후 17세기 대동법으로 서문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발전한다. 당시 서문시장은 유통, 상업, 물류의 중심이었다. 이에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서문시장은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의 중심 장소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을 담당하는 조직인 금영상채회가 서문시장 북후정에 군민대회를 개최해 의연금 모금을 끌어냈다. 또 1919년 3월 8일에는 대구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이 서문시장 한복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운동 연설을 거행했다.이후 1923년 4월 서문시장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재 위치에서 서문시장을 열게 된 것. 1923년 대구부는 '시구개정사업'에 따라 약 39만원의 예산으로 천황당못을 메웠다. 주변 정비를 통해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전체 면적 1만5천 21㎡ 으로 현재 면적(3만4천㎡)보다 절반 정도 작았다. 6·25 전쟁 후에는 대구와 인근의 직물공업을 배경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포목과 주단 도소매 시장이 형성됐다.서문시장에서 오랜 기간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상인들이 서문시장과 마주한 첫 기억은 '천막'과 '사람'이다. 1974년부터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최병천(74)씨는 "어린 시절 마주한 서문시장은 좌판에 할머니들이 식품 등을 쭉 깔아놓고 팔았던 모습이다. 어머님과 장을 볼 때면 뻥튀기, 호떡, 풀빵 등을 얻어먹는 게 낙이었다"면서 "중학생쯤 기억나는 장면은 온갖 재료를 넣고 만든 '꿀꿀이 죽'이다. 당시 20~30원에 판매했는데,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설명했다.서문시장 동산상가에서 1983년도부터 40년째 장사를 이어오고 있는 A씨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던 기억이 있다. 점포에 서서 입구를 바라보면 사람들의 머리가 수박처럼 동글동글한 게 가득차보였다"면서 "노점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가면 갈수록 사람 수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는 게 아쉽다"고 했다. 서문시장의 다양한 품목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섬유'다. 1950년대 서문시장은 전체 점포의 40%가 섬유 관련 상품을 취급했다. 1960년대는 섬유산업이 국가의 전략산업으로 육성된다. 이에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직물도매업자들이 제조업에 참여하며 섬유산업의 성장을 이끌어 가기도 했다. 1970년대는 서문시장에서 원단이 전국적으로 많이 팔렸다. 당시 1만 2천여 명의 상인이 하루 평균 4만 5천여 명의 손님을 맞이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섬유 관련 품목이 인기를 얻었다. 최씨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문시장에서 원단 도매하는 것을 배웠다. 70년대는 면직 등 섬유라고 하면 서문시장이 제일 알아줬다"면서 "섬유 관련 품목이 잘 되다 보니 1·2지구에 부자들이 많았다. 외국에서도 바이어가 찾아오기도 하는 등 서문시장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상인 A씨는 "60~70년대 당시 서문시장을 와야지 섬유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서문시장 물건이 가지 않는 지역은 없었다"면서 "섬유 관련 업종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5천만 원어치 물건이 한 번에 거래됐다고 한다"고 했다. 섬유 등으로 과거 서문시장은 계속해서 성장했지만, 시련도 있었다. 그중 서문시장은 '화재' 관련한 많은 아픔을 겪었다. 1951년부터 2016년까지 총 17회의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이유는 '촛불', '전기합선', '난로 과열' 등 다양했다. 화재는 서문시장 상인들의 삶을 터전을 빼앗았다. 또 다른 형태로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서문시장 2지구는 2005년 12월 화재를 겪은 후 2012년 재탄생했다. 새 상가는 주차장, 승강장, 에스컬레이터 등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또 방화벽, 화재 비상 시스템 등 안전장치를 갖추며 시장 현대화의 표본이 됐다.최씨는 "옛날 3지구에 유기그릇 같은 것을 많이 팔았는데, 1976년쯤 화재가 발생했다. 그 자리에 주차장과 소방서가 들어섰다. 3지구에 있었던 상점들은 동산상가로 옮겨갔다"면서 "화재 당시 부모님 나이쯤 되시는 분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 당시 상황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오래 장사하시는 분 중 화재로 인한 애환이 있으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영상=이형일기자 hilee@yeongnam.com서문시장 이전 100년을 앞둔 모습. 1974년부터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최병천씨.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40년째 장사를 이어오고 있는 상인 A씨가 동산상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2016년 11월 서문시장 4지구 화재 모습.
2023.05.06
서문시장 김영자 상인 "서문시장은 나의 삶의 터전이며 죽기 전까지 나올 곳"
"서문시장은 내 삶의 터전입니다."지난달 28일 서문시장 동산상가에서 만난 김영자(여·82)씨는 서문시장의 의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충청도가 고향인 김씨는 18살 때 지인의 가게에서 일하기 위해 서문시장에 처음 방문했다. 김씨는 당시 서문시장은 '판자촌' 모습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판자촌인 상황에서 천막을 쳐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고급 섬유가 서문시장에 많다 보니 유명한 시장이었다"면서 "장사가 너무 잘돼서 점심 먹을 여유도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후 김씨는 서문시장을 떠나 서울 생활을 하던 중 1967년 다시 서문시장에 자리를 잡게됐다. 양장점에서 남편이 점원을 하던 중 1970년도 김씨는 양장지 원단 관련 가게를 차리게 됐다. 이후 양장지 원단이 사양 사업이 되자 한복 주단으로 품목을 변경했다. 현재는 해당 가게를 접고 딸들의 소품 가게 등을 봐주고 있다.양장지 원단, 한복 주단 등을 판매했던 김씨는 서문시장의 '섬유' 인기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국에서 서문시장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김씨는 "과거 최고의 섬유를 구하기 위해선 서문시장을 왔어야 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 서문시장 물건이 안 들어간 곳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과거 서문시장은 냉난방 시설이 열악했다. 90년대가 되어서야 냉난방 시설이 조금씩 설치되기 시작한 것. 당시 겨울철에는 매점에서 뜨거운 물을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김씨는 "냉난방 시설이 좋지 않다 보니 추운 겨울날에는 손발이 얼기도 했다. 매점에서 뜨거운 물을 수통에 넣어 100~200원에 팔았다. 수통을 끌어안고 장사를 했다"면서 "더운 날에는 부채질할 수밖에 없었다. 장사를 끝내고 오자마자 씻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또 과거 서문시장 상점의 모습은 현재와 다른 형태인 '단'이 있었다. 그는 "지금이랑 다르게 옛날에는 상점마다 단이 있었다"면서 "단 위에 가게 주인이 있고 밑에 손님이 있는 형태였다. 밑에서 주문을 하면 위에서 수치 등을 재기도했다"고 설명했다.이처럼 서문시장과 함께 세월을 겪은 김씨도 화재 피해를 겪었다. 1970년 화재와 2016년 화재로 피해를 본 것. 1970년대에는 대처 상가가 없어 4지구 옆 사거리에 자리를 잡고 손수레에 원단을 두고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70년 화재로 가게 선반에 있는 물건이 다 타버려서 고생했다. 당시 너무 추웠지만 밖에서 상가가 없어 밖에서 장사했다. 빙판이 꽝꽝 얼기도 했고 손도 얼어서 장사하는 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면서 "2016년 4지구 화재 후에는 2017년 동산상가로 가게를 옮기게 됐다"고 했다.그럼에도 김씨의 가족에게 서문시장은 중요한 장소다. 3대째 서문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과 두 딸 그리고 며느리, 조카 등이 서문시장에 자리를 잡았으며 손녀도 서문시장에 자리를 잡을 계획이다.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권한 이유에 대해 김씨는 "옛날에는 회사라는 개념이 없었다. 장사가 아니면 농사짓는 게 대부분이었다"면서 "농사보다는 장사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자녀들에게 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김씨는 서문시장은 '활력소'라고 설명했다. 그는 "긴 세월 서문시장과 함께했다. 현재도 서문시장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서문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자식을 낳고 공부시키고 했다"면서 "시장에 매일 출근하는 덕분에 규칙적인 생활도 하고 건강도 좋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에게 내가 시장에 나오지 않으면 죽은 줄 알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했다.글·사진=정지윤기자 yooni@yeongnam.com 영상=이형일기자 hilee@yeongnam.com지난달 28일 서문시장 동산상가에서 만난 김영자씨가 서문시장과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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