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대구 고인돌 다 어디 갔을까?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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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0-12   |  발행일 2012-10-12 제33면   |  수정 2012-10-12
대구GEO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20121012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가창제일교회 뒤편 고인돌공원. 하늘 위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고인돌을 닮은 듯하다. 신천 상류 냉천리에는 수십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8기(대구시지정기념물 제14호)만이 교회 뒤편에 잘 보존돼 있다.

대구는 고인돌의 도시였다.

향토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구 3천, 경북 3천 등 대구·경북지역에도 6천여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부산, 광주, 인천보다 고인돌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대구지역은 일제강점기 이후 도심개발과 확장으로 100개 남짓 남아있다. 경북지역은 영일만과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일대, 경주시, 영천시, 의성군, 청도군에 특히 많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고고학자는 현 대구중학교~경북대사대부설고 도로변에 줄지어 있는 대구의 고인돌을 주목한다. 1927년 일제는 대구 ‘대봉동 고인돌’에 대한 확인조사를 실시했다. 국내선 처음이었다.

청동기시대는 일반적으로 전(기원전 10~8세기)·중(기원전8~6세기)·후기(기원전 6~4세기)로 나누고, 청동기 유적은 고인돌무덤과 주거지로 분류한다. 대구의 고인돌무덤형태는 강화도와 그 이북에 있는 북방형의 탁자식보다 바둑판같은 기반식이나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개석식 또는 묘표식(墓標式) 등 남방형이 대부분이다. 축조 시기는 대개 청동기후기라고 본다. 주로 신천 상·중류 양안, 달서구 진천천과 달성군 천내천, 칠곡 팔거천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이희준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에 따르면 대구지역 고인돌무덤이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하더라도 신천중류 대봉동, 상동 등지와 진천천 유역 상인동, 진천동 등지의 둘레가 3~4㎞에 불과하고, 고인돌무덤의 중심간 거리가 8~10㎞라고 밝히고 있다.

고고학계는 청동기시대 대구 사람들이 주로 고인돌무덤과 돌덧널(석관묘)과 돌널(석곽)에 묻혔다고 추정한다.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출현한 것으로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작게는 10기, 많게는 40기 이상 집단을 이뤄 발견되기도 한다. 그런데 30~40기 이상 집단을 이루며 축조된 시기는 주로 청동기후기”라고 주장했다.

고인돌이 청동기후기에 집중적으로 집단을 이루며 축조된 원인은 무엇일까.

김권구 계명대 행소박물관장은 “무덤뿐만 아니라 농경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며 마을이나 집단의 영역을 표시할 필요성이 증대됐고, 토지문서가 없던 시기라 자연경관상 집단의 영역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념물로서의 기능이나 제례 등 사회통합장소의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구의 고인돌이 해발 20m 이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함순섭 대구박물관장은 “홍수 때 강물의 범람이 고인돌 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신천의 물길과 나란히 자연제방을 따라 상동에서 하류로 계속 이어져있던 고인돌이 해발 38m 지점인 대구역 부근을 끝으로 그 북쪽에선 확인되지 않는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함 관장은 또 “청동기시대 대구지역 큰 강 인근의 홍수위는 31~32m보다 약간 아래에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하천에 제방이 없던 시기 신천과 연결된 금호강, 진천천과 연결된 낙동강이 범람해도 안 잠길 정도의 산지나 구릉지에 고인돌이 주로 분포돼 있다”고 주장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도심이 확장되고 대규모 공장이나 주택단지가 들어서는 등 국토개발과 농지정리로 거추장스러웠던(?)고인돌은 굴착기나 불도저에 의해 제자리에서 옮겨지거나 매몰·멸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굴착기의 등장과 고인돌 수난 시기는 거의 일치한다.

정만진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은 “대구시사(市史)에 대구분지를 흐르는 신천유역에 분포한 고인돌무덤군은 대부분 남방식 지석묘군으로, 1920년대 초기만 하더라도 대구읍성 바깥에 위치해 장관을 이뤘다고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가장 먼저 훼손됐고 이후에도 공업단지 조성, 시가지 확장 등 국토개발로 멸실됐다. 또 대구시가 펴낸 ‘대구의 향기’에는 대구역~달성공원과 화원읍에 이르는 도로 부근 2㎞에 걸쳐 수많은 지석묘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지난 3~4일 정만진, 구본욱 대구지오 자문위원과 기자는 대구지역에 산재한 고인돌무덤을 답사해 선사유적을 톺아보았다.
글·사진=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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