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能居士로 이름난 서병오
어린 서동균 글씨 보고 감탄
자신의 체본·雅號 지어 선물
1922년 교남시서화硏 창립
19세 서동균 등 제자 양성
영남 문인화 전국 입지 구축
한국 문화예술사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근대기에 향토 서화가로서 동양화를 그린 사람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이보다는 서예중심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러한 때 그림과 글에 두루 능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대구를 영남지역을 넘어서 한국의 문인화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서화가로 석재 서병오와 죽농 서동균을 꼽을 수 있다. 사제지간인 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것은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석재 서병오= 시(詩), 서(書), 화(畵), 문(文), 금(琴), 기(碁), 박(博), 의(醫) 등 여덟 가지에 능해 팔능거사(八能居士)라 불렸던 석재 서병오(1862~1936)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서화가로 시와 서예, 사군자를 비롯한 문인화를 남겼다.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여러 분야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당대의 문화를 풍부하게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서병오는 신동으로 이름이 나서 ‘서동(徐童)’으로 불렸다. 당시에 ‘서씨집 아이’라면 으레 서병오를 가리킬 만큼 총명하고 소문이 났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당대의 거유 허방산, 조심제 등에게 수학했고 한의사 이석곡에게 의학도 배웠다. 대원군은 다재다능한 서병오를 총애했으며 그를 압동초유지재(鴨東初有之材)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그는 대구에서 최초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창립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정대유, 김돈희, 김규진 등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의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영남 서화의 위상을 전국에 알렸다.
1922년 1월 창립된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지역문화를 활성화시킨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서병오가 회장, 박기돈이 부회장을 맡았다. 시서화에 교양을 지녔거나 애호하는 대구와 인근지역의 문화계 인사는 물론 전국 각지의 문화계 인사들이 교류하는 장이었고 전람회, 휘호회를 열어 서화의 감상과 유통을 촉진하며 지역간의 서화 교류를 활성화시킨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지방에서는 두번째로 개설된 사설미술강습소이기도 했다. 이 연구회를 창설한 목적에서 후진양성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서병오의 제자 중 대표적인 서화가는 김진만, 배효원, 서동균이다. 김진만은 서병오의 조카사위로, 57년의 길지 않은 생애와 독립운동으로 인한 10여년의 영어(囹圄)로 인해 작품활동이 짧았음에도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병풍을 비롯한 대작을 많이 남겼다.
배효원도 교남시서화연구회 작가 중 조선전람미술회에 7회나 입선하는 등 전국적 주목을 받은 작가였다.
서동균은 서병오가 직접 발탁한 제자다. 작고할 때 당시 35세의 젊은 서동균에게 자신의 명정을 쓰게 해 후계자로 인정했다.
석재에 대한 연구를 해온 이인숙 영남대 강사는 서병오와 교남시서화연구회의 미술사적 업적에 대해 “1900년대 초반의 대구서화계에서 서병오는 대구의 문인화를 형성시킨 원조에 해당한다. 자신의 서화 창작과 교남시서화연구회의 활동을 통해 지역 서화인들을 결집하고 후진을 양성함으로써 대구 서화계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사군자의 대가였던 죽농 서동균= 1902년 태어난 서동균은 19세때 서병오에게 서화를 배웠고 서병오의 예술세계를 계승하면서도 그만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구축한 영남의 대표적인 서화가다.
서동균은 이 분야에 어릴 때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서병오는 우연히 서동균의 글씨를 보고 그를 불러서 서예에 정진하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자신의 그림과 글씨를 공부할 체본을 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죽농(竹農)’이라는 아호도 지어주었다. 서병오에게 1년간 사사한 후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대가에게 사사하다 귀국해 서병오가 세운 교남시서화연구회에 들어가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20세때 선전에 출품해 입선하고, 그 후 연 8회 특선 또는 입선했다. 국내외에서 열린 다른 전람회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22세때 첫 개인전을 가진 뒤로 8회의 작품전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외롭고 쓰라린 서화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온 그는 그 기법이 탁월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혜성학교 졸업반인 1919년 3·1운동때 대구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애국지사의 면모도 갖춘 서동균은 작가로서는 물론 교육자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광복 후 경북여고에서 8년 동안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김종복, 이효자 등 미술에 재능을 가진 제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 후 신명여고에서 4년간 재직했고, 만년에는 대구대와 효성여대에 출강해 서화를 지도했다.
그는 스승이 운영하던 교남시서화연구원을 영남서화원으로 개칭해 문하생을 지도했다. 이를 통해 서경보 도리석 홍순구 임기순 송석희 박근술 김해성 등 현대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서예가들을 배출했다.
지역미술 발전을 촉진시킨 미술단체의 결성에도 적극 동참했다. 주경 김창락 변종하 등의 서양화가와 경북미술가협회를 만들어 전람회를 열었다. 그 뒤 대구화우회도 결성해 영남서화원 자리에 간판을 걸기도 했다.
이런 왕성한 예술활동을 인정받아 1957년 제2회 경북문화상을 받았다. 75년 서예부문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문화훈장인 대한민국예술문화상을 수상했다. 그 해 재야작가로는 처음으로 국전 초대작가로 추대되면서 심사위원에도 위촉됐다. 78년 타계한 서동균은 76세까지 장수하며 석재의 유업인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계승해 후진양성과 향토문화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대구시가 펴낸 책 ‘대구의 문화인물’에서는 서동균에 대해 “호남지역의 화풍에 대응하는 영남지역 문인화풍을 형성시켜 지방문화예술을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며 “서동균은 전통적 법식에 의한 철저한 수련을 거친 후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했으며 특히 묵죽화로 근대서예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스승-제자’ 같은 뿌리 다른 단체…석재·죽농 기리는 공동사업 절실
사제지간인 서병오와 서동균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은 그동안 지역미술계에서 꾸준히 있어왔다. 남긴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못하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지역의 서예인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사들이 주축이 돼 이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뜻을 이어받아 발전시켜나감으로써 지역서예의 전통을 계승하고, 나아가 한국서예의 발전에도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서병오를 기리는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와 서동균을 기리는 죽농서단으로 나뉘어 각기 현창사업을 펼쳐왔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는 서병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2012년 창립됐다. 대구예술대 이의익 총장이 회장, 대구예총 류형우 회장·달성서씨대종회 서영택 회장·문인화가 채희규씨가 부회장을 맡았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는 창립회원들의 모금을 통해 기금을 조성, 석재서예상을 제정해 지난해 첫 시상을 한 데 이어 올해 두번째 수상자를 냈다. 올해는 석재 서병오전 2014, 제2회 석재서예상 수상작가 김태정 초대전, 국제교류전 등을 열 예정이다.
교남시서화연구회의 후신인 죽농서단은 현재까지 몇 차례 이름을 바꿔가며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스승인 서병오가 회장으로 있던 교남시서화연구회를 1936년 서동균이 계승해 운영하면서 광복 후 영남서화회로 개칭했다. 2006년 다시 영남서화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에 5개 지회를 설치하면서 확대 개편했다. 또 서동균의 아들이자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서예가 서근섭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해 단체를 이끌어갔다. 2009년에는 영남서화협회에서 다시 <사>죽농서단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죽농서단 회원전, 죽농서화대전 등을 매년 개최해오고 있다.
뿌리가 같은데도 이처럼 각각의 단체를 결성해 활동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지역의 원로서예가들이 중심이 돼 두 단체로 나뉘어 각기 다른 사업을 벌일 것이 아니라, 사제지간인 두 사람을 함께 현창하는 사업을 추진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죽농서단 서근섭 이사장은 “얼마전 원로 서예인들이 찾아와 두 분 모두 지역 서화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데다 사제지간이고, 스승이 이끌어왔던 단체를 제자가 이어받아 지금까지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각기 다른 단체로 나눠 두 분을 현창하기보다는 공동의 사업을 벌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해왔다. 타당성이 있는 의견인 만큼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1983년 두 분의 예술비 제막식을 하면서 ‘석재 서병오·죽농 서동균 양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이미 결성됐다.
서 이사장은 “당시 한준우 위원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그 후 몇몇 일이 생기면서 활동이 미미했는데 이를 다시 살리는 사업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 도움말=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 죽농서단, 대구시 발간의 ‘대구의 향기’ ‘대구의 문화인물’,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발간의 ‘대구시사(大邱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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