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 시인의 시골에서 .2] 충북 옥천에서 옻과 만나다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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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2-27   |  발행일 2015-02-27 제39면   |  수정 2015-02-27
250년 된 옻샘 마을…옻된장 담가 생활할 방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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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에서 시골생활을 하기 전에 일단 사막에서 워밍업을 했다. 캐나다 이민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낯선 언어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남을 섞이게 하지 않는 사회생활, 자신의 가치와 다른 가치를 인정한다는 사회적 통념에는 사회조직을 위해 개인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며, 규율을 중시해야 한다는 중세 유럽의 ‘영주주의’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저울질하며 이집트의 한 사막을 헤맸다.

거기서 한 이집트인을 만났다. 시와사막 한가운데 있는 소금 호숫가였다. 아드레라 아멜라. 우리말로 ‘흰산’이라 불리는 생태호텔 주인이었다. 그는 아예 전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현대 문명이 주는 편리함을 거부하고, 자체 생산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 가스등 밝히고, 냉장고 대신에 산속 토굴을 이용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염호(鹽湖)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메뉴를 짜고, 농산물이 생산되지 않는 시즌이 되면 호텔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그 주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이곳의 가장 큰 상품은 불편함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편함은 하나의 상품이지요. 사람들은 남과 다른 경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사막의 밤 하늘을 보는데는 전깃불보다 촛불이 알맞고, 먹는 것 또한 자연이 만들어내는 재료만큼 특이한 맛을 만들어 내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내놓은 서비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연 앞에 놓인 인간의 불편함을 경험시켜 깨닫게 되는 겸허함입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한 말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옛날 소금 카라반이 머물렀던 소금호수로 떠오르는 태양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었다. 여명과 더불어 주위는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과 사막 모래, 소금호수가 태양의 눈부신 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투탕카멘의 금빛 마스크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오직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는 자연과 사람의 생각이 일치될 때만이 가지는 공간이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우주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 내 삶도 그런 경전의 한가운데 놓여지고 싶었다. 나도 내 삶의 경전을 쓰고 싶었다. 그 경전은 낯선 땅에서 미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을 통제하면서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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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에 잠긴 충북 옥천군 청성면 고당리 일명 ‘옻샘마을’의 옹기. 필자가 관리하고 있는 이 옹기 안에는 해묵인 옻된장과 어육장 등이 자연발효 중이다.


고속도로 바로 옆이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교통오지
산비탈 곳곳에
화칠용 옻나무 원형도 보존
주민, 옻나무로 약재 만들고
여러가지 음식 만들어 먹어

실적위주의 행정가와 달리
나는 전통문화 복원 차원서
옻을 활용한 산업을 생각해


◆옥천에서 시골생활을 시작하다

이민생활을 접고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찾아다녔다. 방향은 정해졌다. ‘다시는 도시에서 살지 않겠다’였다. 캐나다의 자연과 사막에서의 체험이 생을 자본의 부속물로 낭비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때 옥천이 다가왔다. 250년 된 옻샘이 있다는 소리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방송국에서 한국의 오지라는 특집을 할 때, 마을 건너편 나루터에서 불어난 강물로, 현장을 둘러보지 못하고 철수를 했던 곳이었다. 경부고속도로 옆에 있지만, 차로 들어오는 길은 이웃 군을 통해서 와야 한다는 마을. 고속도로 선형 개량을 하면서 폐 고속도로 다리가 군도로 바뀌어 차도가 열린 곳이었다. 옥천은 세종실록에 공납품으로 옻이 소개된 오랜 역사가 있는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전국 삼대 옻 주산지 중의 하나였다. 그 주산지의 핵심 역할을 하던 마을이 내가 찾아와 살고 있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옻 주산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우선 지명에 내천(川)자를 가진 곳이 많다. 대표적인 곳으로 평안도 태천을 비롯해 경상도 마천, 경기도 부천, 충청도 옥천 등이다. 이들은 강을 끼고 산비탈이 발달해 있다. 자연히 교통이 불편하고, 현지인들의 삶은 척박했다. 작물을 제대로 심을 땅이 없었다. 논이나 밭이 여유가 있으면 옻 오름의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만큼 옻 일은 힘들고 위험이 따르지만, 수입은 확실했다. 옛날에 하루 쌀 한 말 수입이 보장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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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된 옻나무 아래 ‘옻샘’. 이 물로 각종 장을 담근다.

◆옻샘과 조우하다

나는 주민들이 250년 되었다는 옻샘에 관심이 갔다. 그 샘에서 남은 삶의 후반기를 길어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옻샘은 우리 지명 중에서 한 군마다 하나씩은 발견되는 명칭이다. 같은 지명이라도 유래는 완전히 다른, 두가지로 구별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옻나무 옆에 샘물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옻 오른 사람을 고친다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옻나무가 생활 주변에 흔하게 자라는 우리나라에서 만나게 되는 지명이다. 그 중 마을 주위에 있는 옻샘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많다. 옻이 많이 나는 고장에서는 일부러 옻샘을 만들어 주민들의 옻오름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옻나무 뿌리를 거쳐 나온 물을 조금씩 먹음으로써 옻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마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 다른 옻샘은 옻이 오른 사람을 치유하는 옻샘이다. 물 속의 미네랄 성분이 상처를 치유하여, 옻 오름 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것이다. 같은 지명이지만 이용 방법이 다른 이 옻샘이라는 단어는 옻의 위험함과 유익함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말이었다. 나는 그 옻샘을 통해 우리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보이고 싶었다. 주민들과 공동체 같은 것을 만들어, 함께 나눌 수 있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옥천은 새로운 자원으로 옻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문제는 방향성이었다. 행정가로 이루어진 비전문가 집단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했다. 기존 방식으로 옻나무를 키워 주민 소득을 창출한다는 것이 사업의 개요였다. 경험과 현장 주민의 문제점을 들여다보지 않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다. 칠을 생산하는 국내 옻 사업은 침몰 직전의 난파선과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옻을 생산하는 주민들의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계획은 나중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잘못된 재배 방법과 문서상 실적에 빠져 보급한 사업은 결국 옻나무의 재배 실패로 이어졌다. 이런 계획의 이면에는 지역 공무원들의 또 다른 욕심이 숨어 있었다. 몇몇은 퇴직 후의 일거리로 활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런 행정기관의 방향성은 수십년을 바라보고 키워야 하는 옻나무를 단기 작물처럼 홍보하여 주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나의 옥천 생활은 어쩌면 그들과 싸움을 벌이는 일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나는 공무원들이 원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을 가지고 옻을 들여다보았다. 옻을 문화적이며 지역 공동의 자산으로 보고, 이를 일반화시키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 옻 문화가 일본과 달리 집단적인 노동을 중심으로 발달해 온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 전통 옻 채취는 개인 중심의 생칠 채취보다 여러 명이 공동으로 작업해야 하는 화칠 중심의 문화로 발전해 왔고, 그 과정에서 옻을 식용으로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배경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모든 것이 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오랜 전통이 작물의 생산과 관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오지가 가진 가능성

옥천에서 옻을 다루게 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도, 그런 전통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지리산 일대 마천이나 강원도 원주는 제법 알려졌지만, 이곳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것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였기 때문이다. 자연히 옛날 우리 옻문화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산비탈 곳곳에는 화칠(火漆·옻나무를 불에 달궈 받아낸 진액)용 옻나무들이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는 것이 산업화와 도시화 흐름 속에서 한발 비껴나 있게 하여, 현재와 과거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현지 주민들의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울철이면 옻나무 껍질을 벗겨 약재를 만들던 풍습이 남아 있었다. 60대가 넘는 주민들은 집집마다 장을 담그고, 옻나무을 이용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나는 그들의 생활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 전통장의 원형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옻된장’. 사찰이나 민가에서 장을 담글 때 장맛을 달게하고 잡내를 없애는 방법으로 옻나무 가지를 몇 개씩 넣는 풍습이 있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그것을 활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옻된장을 담가 시골생활을 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무렵 옻으로 장을 담가 식품으로 판매할 수 없는 규정이 있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는 옻샘물을 이용하기로 결정 했다.

한때 시골로 들어 오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장에 대한 관심을 표하던 분이 많았다. 일반적인 장을 만들려면 그만 두는 것이 좋다. 된장이나 간장, 혹은 고추장을 시골생활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일은 숱한 실패자들을 만들어 냈다. 특이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장류들은 생활의 방법을 제공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땅의 식품 위생법이다. 농가에서 자가 생산한 장을 일반인에게 판매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파는 식품은 일정한 규모의 시설을 갖추고 생산 판매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시설을 갖추고, 전통장을 생산하는 것은 전업화를 하지 않으면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없다.

나는 옻된장도 다른 방식으로 담글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바로 장을 땅 속에 담그는 ‘어육장’이다. 꿩과 쇠고기, 전복과 조기 등이 들어가는 전통장이다. 어육장 특유의 냄새를 옻으로 처리하여 한동안 사라졌던 어육장 대중화를 꾀했다. 이런 특이한 옻음식을 생산하는 마을을 만든다는 계획은 옥천을 옻산업 특구로 지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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