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세계 음식을 찾아서(6) 일본2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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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03   |  발행일 2015-04-03 제41면   |  수정 2015-04-03
스시·소바·덴푸라…日食의 주요 메뉴 대부분은 일본 에도시대에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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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초밥은 바다 생선을 사용하지 않고 붕어를 사용한 ‘나레즈시’다. 1820년쯤 초밥을 손 안에 넣고 꽉 움켜쥐어 만드는 ‘니기리스시’로 진화한다. 초밥 한 개에는 약 300개의 밥알이 뭉쳐지고 체온과 비슷한 온기를 갖고 있어야 한다. 대구 들안길 일식집 ‘어담’의 초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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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의 대가 중 한 명인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70대에 그린 ‘후지산 36경’ 중 특히 해일 이는 바다 풍경은 가장 시각적 미학이 돋보여 한국 일식당 주인들이 선호한다.

일본은 ‘벤또’의 고향. 그 좌장 격은 ‘히노마루 벤또(일명 일장기형 도시락)’. 이 벤또의 고안자는 메이지 시대의 장군 노기 마레스케(1849~1912). 패전 직후 일본인들은 배고플 때 이걸 즐겨 먹었다. 밥 중간에 ‘우메보시(매실 장아찌)’를 한 개만 박아 넣는다. 그게 꼭 일장기처럼 생겼다. 우메보시는 매실을 시소(紫蘇·차조기) 잎에 넣고 빨갛게 물들여 배합초에 절인 것. 지금 한국 일식당에선 찾는 사람이 없어 거의 사라졌지만 70년대 지역의 일식당에선 우메보시가 감초처럼 잘 팔렸다. 강력한 향취 때문에 그것 하나만 있어도 밥을 다 먹을 수 있었다.

신칸센 철도의 등장으로 일본 전역에 벤또 붐이 일어난다. ‘에키벤(일명 ‘기차역 도시락’)’시대가 열린 것. 에키벤의 출발점은 1885년 7월 일본 도쿄 동북부 지방에 있는 우쓰노미야역. 에키벤만큼 지역색이 잘 반영된 음식도 드물다. 시즈오카 서부 지역의 하마마쓰역은 ‘장어 도시락’, 호쿠리쿠 혼센 철도의 도야마역은 ‘송어초밥’, 하코타테 혼센 철도의 모리역은 ‘오징어 초밥’ 등 역마다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에키벤이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식 주요 메뉴들은 거의 에도시대(江戶·1603~1867) 때 완비된다. 초창기 에도는 런던 인구보다 많은 100만명의 대도시였다. 1657년 에도가 대화재를 당해 시가지의 3분의 2를 태워 날린다. 복구를 위해 많은 일꾼이 에도로 모여든다. 객지에 혼자 온 ‘초닌(町人·에도시대 상공 종사자)’들은 끼니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주머니 사정이 그렇게 넉넉지 못했던 그들에겐 포장마차 스타일의 ‘야타이(屋台)’가 인기 캡이었다. 여기서 스시(초밥), 소바(메밀 국수), 덴푸라(튀김) 등이 생겨난다.


벤또, 일본 메이지시대 장군이 고안

사시미의 출발점은
생선 이름을 알기 쉽게 적어
회에 꽂아둔 이쑤시개 크기의 깃발

최초의 초밥은
바다 물고기가 아니라 붕어를 사용

사시미 칼은 무사용 칼 제작의 산물
정종 이름 붙은 등록 술 상표 130종


◆ 사시미와 스시

사시미(刺身). 전국시대 일본의 영주가 좋아하는 횟감 생선 이름을 알기 쉽게 이쑤시개 정도의 깃발에 생선 이름을 적어 회에 꽂아둔 게 사시미의 출발이다.

이탈리아에 파스타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다 알기 힘들 듯 일본 스시(壽司) 종류를 다 알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스시와 사시미를 가장 일본스러운 음식으로 본다. 사시미도 스시에 포함되는 조리과정이기 때문에 스시에서 일식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퓨전 스시의 열풍이 일어 원형은 거의 잊히고 있다. 현재 일본요리협회도 자기 나라의 스시 종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자고 일어나면 신형 스시가 개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엔 초밥 식당 수만큼 초밥 수도 많다고 보면 된다. 우리의 김밥과 비슷한 게 자그마한 나무 상자에 스시를 밀어넣고 눌러 빚으면 되는 ‘오시즈시’다.

최초의 초밥은 바다 생선을 사용하지 않았다. 붕어를 사용했다. 생선의 뱃속을 깨끗이 손질해 그 속을 밥으로 채워 무거운 돌로 눌러 숙성시킨 ‘나레즈시’, 그게 초밥의 원형이다. 나중에는 아예 밥을 식초와 소금으로 간을 해 버리는 ‘히야즈시’가 개발된다. 에도 생활이 점차 바빠진다. 급기야 1820년쯤 현재와 같은 생선초밥, 초밥을 송편처럼 손안에 넣고 꽉 움켜쥐어 만드는 ‘니기리즈시’가 태어난다. 초밥 달인들은 한꺼번에 300여개의 밥알을 쥘 수 있었다. 밥은 체온과 비슷해야 한다. 하지만 상당수 국내 스시의 밥은 냉기를 머금고 있다.

사시미 칼은 무사용 칼 제작의 산물. 그 칼 때문에 엉뚱하게 정종(正宗)이 파생된다.

정종이라는 이름은 흥미롭게도 불교 경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840년 6대 당주가 효고현 니시노미야 지역의 용수를 사용해 술을 만들었다. 새로운 술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을 당시, 어떤 경전(臨濟正宗)을 보고 정종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주의 의도와 달리 사람들이 정종을 ‘세이슈’가 아닌 ‘마사무네’라고 읽어 마사무네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정종은 경전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불교의 뜻을 따르려는 의도보다 정종의 일본식 발음(세이슈)이 맑은 술을 칭하는 청주(淸酒)의 일본식 발음(세이슈)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질 당시에는 하나의 한자가 여러 가지로 읽히는 일본어 특성 때문에 ‘正(마사)宗(무네)’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884년 상표조례가 제정되었을 때 일본 정부가 상표 등록신청을 받자 정종이라는 술 상표 신청이 쇄도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정종을 보통명사로 정했고, 현재 정종이라는 술 이름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 주조연합중앙회에 따르면 정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술 상표는 등록된 것만 130개가 있다고 한다. 상표 수가 많다 보니 특이한 이름도 많다.

◆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선술집 다치노미

일본 술집도 다양한 격이 있다. 서민 상대의 대중적 선술집인 다치노미(立飮)와 이자카야(居酒屋), 여자 한두 명이 경영하는 스나쿠(Snack)바, 여자가 옆에 앉아 접대하는 구라부(Club), 서민들은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비싼 료테이(料亭). 여관은 우리와 달리 음식을 판다. 쇼쿠도(食堂)도 원래 일본에서 발원한 말이다. 구이 전문점 로바다야키는 한국으로 건너와 투다리 같은 스타일로 변형된다. 다치노미는 2~3개의 테이블, 그리고 10개 정도의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다. 다다미 한 장 크기는 가로 세로 90X180㎝(다다미 2장을 합치면 약 3.3㎡(1평) 크기). 일본인들은 술 마시기 전에 밥을 잘 먹지 않는다. 밥을 찾으면 주인은 술을 다 마신 걸로 안다. 한국 관광객에게 인상적인 게 하시(젓가락) 받침대인 하시오키. 일본에선 젓가락을 드는 법도가 있다. 오른손으로 젓가락의 가운데를 잡고 왼손으로 아래를 받친 다음, 오른손으로 정확히 잡는다.

일본 밥그릇은 왜 철제가 없을까? 그것은 왼손으로 들고 먹기 때문에 가벼운 나무와 사기류가 선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릇을 잡을 때도 엄지손가락으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킨 다음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손바닥으로 공기 바닥을 받친다. 상다리가 없는 찻상 같은 오시키 앞에서 식사할 때는 허리를 굽혀야 해 불편했다. 자연 똑바로 먹기 위해 밥그릇을 들고 먹을 수밖에 없었다.

◆ 사미센과 우키요에

괜찮은 료테이에서는 일본 전통악기인 사미센(三味絃) 가락이 흘러나온다.

가게 입구엔 주렴처럼 생긴 ‘노렝’이 펄럭거렸다. 천으로 만든 노렝의 아랫단은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게 두 곳이 트여 있다. 거기에 상호와 로고 격인 문장(紋章)을 새겨놓는다. 그것은 그 식당의 자존심이었다. 그걸 달면 주인이 ‘절대로 음식 갖고 손님을 속이지 않겠다’는 걸 손님에게 약속한 것이다.

정통 일식당 풍모를 갖추기 위해 18세기 때 절정기를 맞는 일본 민속판화인 ‘우키요에(浮歲繪)’를 여러 점 구해 걸어둔다. 정통 일식당 주인이 우키요에 한 점 못 걸면 단골에게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평생 93차례 이사를 다니고 30차례 호를 바꾼 우키요에의 대가 중 한 명인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 北齋·1760~1849)가 70대에 그린 ‘후지산 36경’ 중 특히 해일 이는 바다 풍경은 가장 시각적 미학이 돋보여 한국 일식당 주인들이 선호했다.

이런 작품들이 정작 일본에선 푸대접을 받고 일부 브로커들을 통해 유럽에서 꽃을 피워 후에 일본으로 역수입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잔, 고흐, 고갱, 모네, 마네, 로트레크 등 후기인상파 작가들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특히 고흐도 우키요에에게 충격을 받아 모작을 그렸고 나중에 그 터치를 활용해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유럽에서의 대박행진을 본 일본의 화상들이 미국 보스턴 등지를 돌며 우키요에 재매입에 나서게 된다. 우키요에 소재로는 가부키, 분라쿠(인형극), 노(能) 등 일본전통극에 출연한 배우, 스모 선수, 게이샤 등이 사랑을 받았다. 요즘 지역 일식당가엔 거의 컬러 프린팅 된 복제품들이 액자나 노렝 형태로 걸려있다. 이 밖에 전통극 노의 여자 가면인 오다후쿠(御多福)·오카메, 금복주의 마스코트였던 복노인처럼 생긴 선동자 가면 등도 일식당 액세서리로 선호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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