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페미니즘, 여성 응징이 만연하는 인터넷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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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4   |  발행일 2019-10-04 제22면   |  수정 2020-09-08
페미니즘 대립이 성대결로
똑같은 행위도 여성만 응징
신상 털리면서 흉악범 취급
뿔난 여성도 남성혐오 맞불
상호공격 공동체 미래 위협
20191004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페미니즘 열풍의 중심에 있는 상징적인 책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진영에선 이 책에 대해서도 반대 운동을 펼친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책과 관련된 여성만 타깃이 된다. 최근 배우 서지혜가 SNS에 이 책 사진을 올리며 ‘책 펼치기 성공’이라고 썼다. 딱 그렇게만 썼을 뿐 페미니즘 주장을 펼친 것도 아니고 이 책에 공감한다고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거론한 것 자체가 문제가 됐다.

서지혜가‘페미코인을 탔다’며 비난하는 글들이 나왔다. 한 누리꾼은 ‘몰랐든, 실수든, 의도였든 (페미니스트) 박제 당했다. 팔로 끊고 간다’고 했다. ‘남성 팬에게 인기 얻고 돈 벌었으면서 페미짓한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김옥빈이 ‘자유롭게 읽을 자유, 누가 검열하는가’라고 해서 김옥빈도 공격대상이 됐다.

소녀시대 수영도 방송에서 이 책 이야기를 한 뒤 공격당했다. 평양공연에 참가했던 레드벨벳의 아이린도 이 책을 읽었다고 인증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정유미는 ‘82년생 김지영’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했다. 그야말로 여성 연예인들이 이 책에 ‘스치기만’ 해도 표적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방탄소년단의 RM이 “시사하는 바가 남달라 인상 깊었다”며 이 책을 언급한 것에 대해선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유재석, 김국진, 노홍철도 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고 노회찬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책을 선물하기까지 했다. 남성인 이들에겐 날선 비난이 없었다. 똑같은 책을 언급해도 여성만 공공의 적이다.

페미니즘 관련 대립이 사상의 대립이기도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남녀 성대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똑같은 책을 읽었다고 해도, 일부 남성 누리꾼들이 여성들만 골라 공격하는 것이다.

여성들을 특히 응징할 대상으로 여기는 인터넷상의 분위기도 있다. 과거에 한 여대생이 TV프로그램에서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발언했을 때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인터넷에서 남성들이 총궐기하다시피 하면서 해당 여성에게 십자포화를 가했고, 신상까지 파헤쳐지면서 그 여성은 흉악범죄자보다도 더 심대하게 사회적 처벌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일부 남성 누리꾼들이 ‘건방지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에게 과도한 응징을 가하는 문화가 최근에 커졌다. 여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품평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데에 만만한 대상이라는 심리도 있다. 똑같은 교통사고도 남성이 낼 때보다 여성이 낼 때 더욱 강력한 공격이 가해진다. 사실 중대한 사고는 남성 운전자가 훨씬 많이 저지르는데도, 여성 운전자가 주차를 잘못한 것 정도를 적발해 ‘김여사’라며 집단적으로 조롱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여성들의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는 것에 대한 반감까지 더해져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여성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를 일종의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간주해, 여성들의 페미니즘 주장의 씨를 말리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측면도 있다. 여기에, 그 여성들이 연예인이라는 게 공격의 당위성까지 부여해줬다. 그동안 남성들의 인기로 부를 누려왔으면서 이제 와서 남성들의 뒤통수를 치는 건 배신이기 때문에 공격해도 된다는 논리다. 최근에 레드벨벳 조이가 한국 여성의 독박육아, 경력 단절 문제를 지적한 게시글에 단지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한 것도 그런 논리로 정당화됐다.

이런 식의 집단 공격이 성대결, 상호 혐오를 조장하는 게 문제다. 일부 남성 누리꾼들이 여성들을 응징하자 일부 여성 누리꾼들도 미러링이라며 남성 혐오 공격으로 맞섰다. 서로 상대방의 공격을 빌미로 자신들의 혐오를 정당화하며 수위를 높인다. 마치 끝없는 정치권 대립의 구조처럼 돼가는 것이다. 이런 식이면 상호공격의 악순환 속에 공론장이 황폐해지고, 혐오가 증오로 심화되어 범죄까지 초래될 수 있다. 특히 청소년들이 이런 식의 혐오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심각한 위협이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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