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문화예술 통한 치매예방 공모 사업

  • 임성수
  • |
  • 입력 2019-12-13   |  발행일 2019-12-13 제39면   |  수정 2020-09-08
할머니들 바느질 주머니 속 ‘젊은날의 추억’

경로당에서 만난 소녀들

팔순 다돼 다시 만난 네모난 천조각

꽃무늬결 따라 떠오르는 이불과 베개

두런두런 쏟아내는 첫날밤의 이야기

작은 천조각 모아 함께 만든 무릎담요

예쁜 콩주머니로 공기하며 어릴적 기억

바늘 한 끝으로 만들어간 행복한 시간
20191213

붉게 물든 단풍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들은 표표히 빈 가지만 든 채 서 있다. 남은 잎들조차 아름다운 빛을 숨긴 채 한순간에 마르고 갈라진 채로 회갈색의 빛을 띠었다. 오밀조밀하고 고왔던 작은 정원의 모퉁이도 허허롭다. 이렇게 넓어 보이는 것은 화분들이 풍성하게 품고 있던 꽃들이며 잎들이 마르고 시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간을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마음 한 구석도 슬며시 비어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그 빈공간이 우리가 추구하는 또 다른 충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낮은 산자락도 이제 단풍잎 사이로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등산로까지 훤히 보인다. 바쁘게 가까이만 보듬어온 마음을 열어 이제 먼 곳을 텅 빈 마음으로 바라볼 시간이 되었다. 

 

경로당에서 만난 소녀들
팔순 다돼 다시 만난 네모난 천조각
꽃무늬결 따라 떠오르는 이불과 베개
두런두런 쏟아내는 첫날밤의 이야기
작은 천조각 모아 함께 만든 무릎담요
예쁜 콩주머니로 공기하며 어릴적 기억
바늘 한 끝으로 만들어간 행복한 시간

 


며칠 동안 박물관에서는 특별한 전시가 있었다. 할머니 10여 분이 20회에 걸쳐 바느질해서 만든 작품들을 전시했다. 천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오색향낭이며 콩주머니, 실을 짜서 만든 브로치, 버선, 복주머니 등을 만들었다.

오늘은 전시된 작품들을 모두 거두어 할머니들이 기다리고 있는 경로당으로 가서 전해주는 날이다. 경로당은 낮은 산자락 옆의 작은 주택으로 만든 공간이어서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편안하고 낯설지 않았다. 방안 가득 앉아 계신 할머니들은 우리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듯 굽어진 허리를 더 깊이 굽혀 인사를 건네며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었다. 더 굽어질 것도 없는 허리인데 언제나 고맙다는 말과 함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넨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는 일이 사람에게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란 것을 느끼게 해 주신다. 경로당에 계신 분들의 평균연령은 80세 정도이며 97세 된 분도 계셨다. 처음 바느질 작업을 시작할 때는 눈이 어두워서 바늘귀에 실을 넣을 수가 없다고 싫어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과 달리 바느질에 열정을 보이셨다. 이 분들은 젊은시절 한복도 만들어보고, 뜨개질로 옷을 짜보기도 했던 분들이어서 오히려 바느질을 통해 젊은 시절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즐거워하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개씩 작품이 만들어 질 때마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집에 가서 가족과 나눈 이야기들을 전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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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가지의 작업 중에서 특별히 의미가 있었던 것은 천을 색종이 삼아 오려 붙여가면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다고 머뭇거리던 분들이 차츰 이야기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백지에 무엇을 채워 넣는다는 것은 지나간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사각형의 자투리 천 한 조각을 붙이는 것도 어려워하셨다. 고르고 고른 무늬 중에서 네모난 천 한 조각을 오려 붙이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 천의 꽃무늬를 따라 이불을 떠올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나보다. 천천히 연필을 들어 이불의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베개를 덧붙여 붙이고 첫날밤의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쏟아내셨다. 손끝에서 떨리듯 가늘고 수줍게 그려진 선들이 우리 어머니들이 조심스레 걸어온 길처럼 보여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 고운색의 천들이 없는지 투정을 하기도 하고 예쁜 꽃무늬에 욕심을 내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동심이 느껴졌다. 한복을 짓다가 잘못 뒤집어서 팔이 4개가 된 이야기에서는 모두 손뼉을 치며 웃었고, 시어머니가 옆집 며느리와 비교하며 베를 적게 짰다고 구박하는 대목에서는 모두 “그때는 그랬지” 하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추억은 모두 때로는 감사한 마음으로,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아픔으로 버무린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할머니들은 세대를 뛰어넘는 친구가 되었다. 작업 중에 공동작업의 하나로는 자투리 천 조각을 이어나가는 일이었다. 작은 천 조각들을 모두 모아 크게 만든 뒤 경로당에서 쓸 무릎담요를 만들었다. 완성된 무릎담요를 펼치자 알록달록한 색들이 환하게 일어서서 경로당의 작은 방이 꽃밭이 되었다. 자투리 천을 이어붙이면서 우리는 모두 이렇게 함께여서 더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만든 콩주머니로 공기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색색의 천들로 만든 콩주머니가 예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공기놀이를 하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셨다. 갑자기 경로당 안은 수 십년 전의 소녀들이 모인 방이 되었다. 촘촘히 감사의 씨줄과 사랑의 날줄로 엮여 완성된 삶의 끝자락은 털실로 엮어 만든 브로치처럼 곱고 아름다울 것이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지만 자신이 먼저 항상 즐겁고 밝게 지내야 치매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늘 밝은 웃음을 보여주시던 분도 계셨고, 엄마가 만들어 온 것들이 너무 예쁘다고 하면서 수업시간을 잊을까 딸이 늘 챙겨준다고 하시며 행복해 하던 분도 계셨다. 그 분들의 모습이 또 시간의 한편으로 저물어 간다. 10여년 동네의 산기슭에 함께 했으면서도 박물관이 그분들에게 너무 멀리 있었던 것이 미안하다. 바늘 한 끝으로 이렇게 모일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었음을 감사하고, 또 그 이야기들은 아직 미완성의 이불처럼 계속 바느질해 나갈 것이다.

그동안 할머니들과 함께 해 온 이 작업들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문화예술을 통한 치매 예방사업 프로그램 공모에 선정돼 지역의 치매안심센터와 연계하여 진행됐다. 전국에 12개가 진행되었다.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늘 하던 수업이 종료되니 뭔가 허전하다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수업이 끝났어도 계속 활동들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작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몫이 남아있다.

선생님들은 그동안 어르신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아쉽게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소중했다고 했다. 바느질은 마치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내리듯 마음을 빗질해주며, 흙탕물이 된 우물물을 가라앉혀서 가려져 있던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해주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바쁜 일상의 틈에서 잠시 우리를 좀 더 깊은 내면의 깊이로 내려가 숨을 고를 수 있는 마법 같은 시간을 선물한다. 그 시간들이 다시 창조적 에너지로 돌아와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요롭게 이끌어 줄 것이다. 이 겨울 차가운 겨울바람과 텅 빈 공간들을 바늘 한 끝으로 다시 채워가는 바느질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박물관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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