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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가장 추워야 하는 소한(小寒)날 눈 대신 비가 내렸다. 봄비 같은 겨울비를 바라보며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를 들었다. 슈베르트는 독일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집 '겨울 나그네'의 2부 24편 시에 곡을 붙였다. '보리수'는 그중 5번이다. 마른 풀잎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보리수'를 다시 읽는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이 구절에 이르면 까닭도 없이 허무하여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던 문학청년 시절이 떠오른다. 사랑, 방랑, 자아 상실 등의 심리 상태를 소박하고 단순한 언어로 형상화한 시편들, 그 시들이 가슴 깊이 파고들어 영혼에 울림을 줄 수 있도록 곡을 붙인 슈베르트, 두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하염없이 내리는 겨울비를 바라보며 서른셋에 세상을 떠난 뮐러와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슈베르트의 생애와 그들의 예술을 생각한다. 새해 벽두 우리를 심란하고 불안하게 하는 남북문제, 이상난동과 호주 산불 같은 생태계의 위기, 이란과 미국의 대결 등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이 험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영국의 정치가 필립 체스터필드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본다. "지금 이 순간은 평생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너의 인생을 결정한다.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얻어야 할 것은 지금 얻어라. 나중에는 늦다." 삼십 대 초반에 요절한 시인과 작곡가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시를 썼고 작곡했을 것이다. 그 짧은 생애에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그런 시와 곡이 남았겠는가. 이 세상을 그냥 정처 없이 표랑하며 운명과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두 예술가는 슬프고 허망한 삶 속에서도 모든 에너지를 창작에 쏟아부었다.
'겨울 나그네'를 읽고 들으며 우리 모두 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한 해를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철학자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수단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통해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만 그렇겠는가. 개인의 삶과 가정도 마찬가지다. 열린 생각이란 자신이 믿는 사실이나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자세로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 자녀가 함께 열심히 배우며 틈틈이 책을 읽고 그 과정을 즐길 줄 아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윤일현<시인·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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