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구미...낙동강변 비산나루 매운탕촌…산단 근로자 회식 장소 최고의 풍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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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14   |  발행일 2020-02-14 제34면   |  수정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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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대구에서 구미 비산나루로 시집을 와 현재까지 아들과 함께 구미 매운탕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문천대 사장이 주방에서 직접 된장 간을 보며 메기 매운탕을 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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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천대 사장의 여자 뱃사공 시절 비산나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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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식당, 한양, 강나루, 수림 등 네 곳의 매운탕집만 남은 비산나루의 현재 모습. 모터보트 한양호가 물결치는 대로 일렁거리고 있다.

불세출의 유학자를 주제로 한 여러 음식을 개발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선비 밥상은 너무 흔하고 선산약주 같은 건 너무 식상하고…. 그걸 알았던지 구미시가 연초부터 '채미정 푸드 마케팅'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3일 금오산상가번영회와 함께 금오산 '채미 보양 백숙' 발굴·육성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것. 올해 구미서 열리는 제101회 전국체전을 맞아 신규 추진되는 사업으로 채미 보양 백숙과 토속주부터 개발한다. 내년에는 특화 음식을 육성하고 2022년에는 홍보 마케팅 강화, 2023년 시설개선 지원으로 구미 대표 먹거리 특화단지로 키워낼 모양이다.

한마디 고언 한다면, 현재 전국에 이 같은 민방위교육용 책자 같은 대표 메뉴사업은 넘친다. 자칫 예산만 낭비할 수 있다. 끼리끼리일 수밖에 없는 관계자 목소리는 가급적 줄이고 그다음은 감각 있는 카피라이터, 디자인마케팅에 능한 구미지역 숨은 고수의 능력을 구하길 바란다. 그런 친구들이 구미 안에 여럿 있는 걸로 안다. 요즘 외지인들에게 무척 핫한 브랜드인 구미발 '청춘껍데기'와 '낭만쭈꾸미'의 성공전략도 절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진지한 콘텐츠를 너무 진지하게 펼치면 관계자밖에 모여들지 않는 게 요즘 정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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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둘레길이 조성된 금오지에는 전국 푸드블로거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물 자판기 커피가 있다. 토박이들에겐 '금오산길다방커피'로 알려졌는데, 현재는 역사문화디지털센터 공사 때문에 그 자판기는 철수되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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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구미 송정동 동아백화점 근처 우방아파트 상가에서 탄생한 교촌 1호점. 당시에는 '교촌통닭'이란 간판을 달고 장사를 했다.



교촌치킨 1호점 & 교촌통닭
1991년 송정동 '교촌통닭' 으로 간판
한달 매출 30만원, 산전수전 세월도
날개·다리 부위별 국내 첫 판매 히트

사람들은 간장프라이드치킨의 신지평을 연 교촌치킨이 구미의 한 구석 자리에서 태어난 걸 잘 모른다. 바로 송정동 구미우방2차아파트 후문 입구다. 1991년 '교촌통닭'이란 간판을 걸고 시작했다. 창업주 권원강의 출발은 너무나 초라했다. 현재는 경기도 오산시로 본사를 옮겨 1천개 이상의 다국적 체인망을 가동한다. 하지만 갑질 논란으로 물의를 일으켜 지난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그는 치킨집을 하기 전 산전수전 다 겪는다. 대구에서 개인택시 운전을 하다가 체력 때문에 면허를 판 돈으로 구미에서 치킨집을 차린다. 보증금 1천만원, 월세 40만원짜리 가게였다. 하지만 2년간 주문이 꽝이었다. 치킨 한 마리에 6천원 하던 시절이었다. 하루 1만원, 한달 30만원이 매출의 전부였다. 그만두려고 했지만 추가 자금이 없어 그냥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운명의 여신이 찾아온다. 전략을 바꾼다. 가게 이름이라도 홍보하자는 생각에서 114 문의전화를 매일 건다. '교촌통닭 전화번호가 몇 번입니까'라는 전화를 전화국에 매일 20통씩 했다. 그런데 전화 안내원으로부터 배달주문이 들어왔다. 그날 퇴근 때 안내원 네 사람이 가게에 들러 한 마리씩 포장해 갔다. 이날 판 6마리가 2년간 최대 판매량이었다.

곧이어 불티나게 팔리는 계기가 된 큰 사건이 일어난다. 갑자기 금성사 구미공장 생산직 직원 10명이 회식을 한다며 가게에 들이닥쳤다.

매장 안에 4인용 탁자 3개밖에 없는데 이미 한 테이블은 손님이 차지하고 있어 10명이 앉을 수 없었다. 권 사장은 잠시 망설이다 10명을 돌려보낸다. 먼저 치킨을 먹고 있던 두 사람이 불편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동 받은 이들은 공장에 소문을 냈다. 이후 금성사 야근 간식은 이때부터 교촌통닭으로 정해진다.

보관하던 날개와 다리가 아까워 대구에 사는 친척들이 가게에 찾아올 때마다 그걸 튀겨서 공짜로 줬다. 반응이 좋았다. 그때 부위별로 팔아보자는 생각을 한다. 날개와 다리를 따로 모은 '교촌골드'가 탄생했고 이게 빅 히트를 친다. 치킨을 부위별로 판매한 국내 최초 사례다. 교촌치킨은 '가맹점 모집'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2003년 가맹점 1천개 돌파 이후 가맹점 모집을 위한 광고도 한 적이 없다. 창업설명회도 하지 않는다. 교촌 본사에는 송정동 1호점 탄생 시점의 전경을 담은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구미 동아백화점 근처에 있는 송정점은 리모델링됐다. 본사가 수도권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1호점이 아닌 송정점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구미 매운탕 어제와 오늘
비산나루 터줏대감 대구식당 여사장
남편은 고기 잡으러 가고 아내는 요리
매운탕촌 양대 산맥 동락나루와 발전

10여 년 만에 구미 비산동 낙동강변 매운탕촌을 다시 찾게 됐다. 그때 대구식당을 취재하며 만난 문천대 사장은 비산나루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였다. 1969년 구미에서 가장 척박한 비산동으로 시집을 왔다. 고향은 대구였다. 이듬해 대구식당을 차린다. 81년까지만 배를 몰았던 남편(신도식)은 고기를 직접 잡고 아내는 요리를 했다. 70년대만 해도 남편은 4박5일 걸려 강창교 근처까지 가서 고기를 구해왔다.

문 사장은 그새 몰라보게 늙어 보였다. 굵직한 대기업이 구미산단에서 빠져나간 탓인지 손님이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맛은 예전 그대로다. 겨울철이라 맛이 일품인 잉어찜은 맛볼 수가 없었다. 칼칼한 국물맛은 여전히 단순하면서도 깊었다.

연골수술 때문에 여사장은 다리를 절고 있었다. 하지만 단골 때문에 요리만은 2002년 가업을 이은 아들(신봉근)한테도 맡기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8개의 화구 앞을 지킬 거란다. 직접 된장을 풀어 간을 보는 그녀의 옆모습에서 도공의 포스가 느껴진다.

구미 나루터 얘기를 좀 해보자. 예전 낙동강 구미 구간엔 모두 8개의 나루가 있었다. 동락, 비산, 강정, 강창, 용산, 송당, 월골, 가산. 낙동강 구미 구간은 약 45㎞. 평균 6㎞마다 1개씩 나루가 놓여 있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일선·승선·산호·구미·남구미·낙동 등 6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나루 양측엔 어김없이 강나루주막이 진을 쳤다.

그 주막의 단골은 강을 건너는 행인들. 장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니 늘 그 메뉴에 그 서비스. 현대식 다리가 놓이면서 주막은 구멍가게, 아니면 식당으로 '버전 업'됐다. 84년 비산동 철선이 사라진다. 철선을 운항했던 전용식씨는 '구미의 마지막 도선장'으로 불렸다.

대구의 강창, 강정, 화원 강나루 매운탕과 한 항렬로 발전해 온 구미 매운탕촌 양대 산맥은 비산과 동락. 비산나루 쪽엔 대구·한양·강나루·수림·버드나무, 동락나루 쪽엔 나루터·왜관·동락·대교 등이 서로 마주 보고 자릴 잡고 있다.

나루에서 즐기는 명품 잉어찜
잉어로 조리한 회·탕·찜 순으로 발전
마지막 처녀 뱃사공이 지켜온 자존심
육수는 따로 없어…고기 자체로 충분


구미 매운탕촌은 구미산단이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구미·낙동대교가 준공되자 거의 1만명이 비산나루를 찾아 몰려들었다. 금성사와 코오롱 등 굴지의 업체들 회식 자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매운탕집이었다. 일본, 미국 등 외국 바이어들도 두 매운탕촌으로 안내됐다. 80년대 들어 해운대 갈비, 금오산맥 등 숯불갈비집 등 각종 외식업소들이 등장하지만, 그 전만 해도 회식 공간의 풍취를 가진 곳은 강변 매운탕촌을 따를 곳이 없었다.

풍광은 비산동에서 양호동 강둑 쪽이 좋다. 그래서 LG전자가 현재 외인아파트 근처에 영빈관을 만들었다. 사과, 참외, 땅콩이 많이 재배되던 강 건너 모래밭엔 대규모 버드나무 숲이 조성됐다. 비산나루 옆에 조성된 구미1산단. 코오롱, LG전자, 오리온전기, 한국전자, 동국방직, 이화섬유, 계림요업, 한일방직 등의 간부들은 물론 직원들도 비번이거나 주말을 맞으면 비산나루로 우르르 몰려왔다.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가서 놀고 오는 것이다.

여기 잉어요리는 회·탕·찜 순으로 발전해 왔다. 두 곳 모두 처음엔 매운탕만 끓이고 찜을 선보이지 않았다. 비산나루 매운탕에 첫 불을 지핀 건 백인기씨. 그는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 강창나루에서 매운탕 장사를 하다가 비산나루로 자릴 옮겼다. 현재 대구식당 자리에서 방을 얻어 매운탕을 끓였다. 60년대 후반쯤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아 계약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그 자릴 떴다. 백씨가 등장할 때 김수홍씨가 현재 한양식당 자리에서 '어정(魚井)'이란 매운탕집을 연다.

백씨가 하던 식당은 당시 29세 때 그곳으로 시집온 대구 비산동 출신 문천대 사장이 이어 간다.

문 사장은 10년 이상 나룻배를 부리는 여자 뱃사공. 그래서 구미시 문화행사 때 낙동강 마지막 처녀 뱃사공으로 뽑혀 나가기도 한다. 그녀의 요리 원칙은 단순한 것. 육수는 별도로 만들지 않는다. 그냥 맹물이면 충분하다. 그래도 고기 자체에서 배어 나오는 육즙을 이용하면 충분하단다. 양파 등 너무 감칠맛을 내는 양념은 금한다. 당면도 너무 지저분해 넣지 않는다. 현재 비산나루 매운탕집은 대구식당을 비롯해 한양, 강나루, 수림 등 모두 네 곳만 남아 있다.

글·사진=이춘호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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