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공간, 문화가 되다 .2] 제주 폐공간의 재탄생

  • 노진실
  • |
  • 입력 2020-10-12 07:35  |  수정 2020-10-12 07:40  |  발행일 2020-10-12 제22면
방치된 통신망 벙커와 폐교, 빛과 자연 품은 갤러리로 온기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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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벙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빛의 벙커' 입구. '빛의 벙커'는 옛 국가 기간통신망을 운용하기 위해 설치된 해저광케이블 기지를 리모델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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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로에 위치한 '자연사랑미술관'. 2001년 가시초등학교가 폐교되면서 방치됐던 이곳이 사진기자 출신인 서재철 관장(왼쪽 아래 작은 사진)에 의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간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아름다운 섬 제주도. 천혜의 자연환경 외에도 제주도에는 외지인의 발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공간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버려지고 방치된 공간들을 활용한 문화공간도 그중 하나다.

폐공간을 활용한 제주의 문화공간들은 천편일률적이지 않아 더 매력적이었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투박한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던 제주의 '다시 태어난' 문화공간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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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에서 고흐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
수십 대 빔프로젝트·스피커
고흐 작품 속에 서 있는 기분
완벽 방음…그림·음악 집중

◆ '빛의 벙커'로 다시 태어나다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큰길을 벗어나 구불구불 이어진 작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무와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온다. 바로 '빛의 벙커'다.

이곳은 원래 1990년 국가 기간통신망을 운용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었다. 20년 가까이 방치돼 있던 벙커는 2018년 이른바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관'으로 재탄생했다.

벙커는 약 3천㎡(900평) 면적의 대형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흙과 나무로 덮여 있어 마치 산자락처럼 보이도록 위장이 돼 있다. 그래서 벙커 바로 앞까지 가서야 그곳에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자가 찾아간 지난달 24일 빛의 벙커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1층 단층 건물인 빛의 벙커에서 만난 전시는 색달랐다. 수십 대의 빔프로젝트와 스피커가 그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그림 테마에 맞춰 음악을 흘려보내면서 마치 관람객이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40대 관람객은 "벙커 안에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고흐의 대표작인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경우 그림 속 별빛이 쏟아지는 론 강가에 내가 직접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마스크를 쓴 관람객들이 홀린 듯이 고흐와 고갱의 작품을 감상했다. 자유로운 감상 분위기에도 관람객이 그림과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벙커'의 특성 때문이었다. 오래된 공간과 새로운 전시방식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

'빛의 벙커' 운영 관계자는 "처음부터 벙커 시설로 지어진 빛의 벙커는 방음이 뛰어나 외부 소리가 잘 차단되기 때문에 '몰입형 미디어 아트' 전시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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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자연사랑미술관' 전시실. 이곳은 폐교가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공간으로 옛 교실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 명소 자연사랑미술관
폐교후 폐허로 변한 가시초등
제주 자연·사람 담은 사진展
시골마을로 몰려드는 관광객

◆주민 곁에 돌아온 폐교 '자연사랑미술관'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에 가면 한적하고 조용한 '가시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는 마을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작은 학교가 있었다. 1946년에 개교했던 가시초등은 2001년 제40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가 됐다.

그해 학교 옆에 세워진 비석이 학교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곳은 가시초등학교 배움의 옛 터입니다. 1946년 개교했으나 4·3사건으로 폐교됐다가 1960년 2차로 개교해 2001년 2월28일로 1천38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아쉽게도 학교에 다닐 어린이가 줄어들어 2001년 3월1일자로 문을 닫았습니다. 이에 이곳이 오랫동안 배움의 횃불을 밝혔던 자리였음을 길이 남기기 위해 이 비를 세웁니다."

폐교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이곳에 '자연사랑미술관'이 개관하고 나서부터다. 폐교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사람은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사진기자로 일한 서재철 관장. 자연사랑미술관에는 서 관장이 직접 찍은 제주의 자연과 사람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실 공간은 나무 바닥 등 옛 학교의 모습을 최대한 살린 모습이었다.

제주 도심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폐교는 미술관 개관 이후 국내외 관광객과 인근 학생들이 꾸준히 찾는 명소가 됐다. 하지만 관람료는 어른 기준 3천원(단체 2천원, 어린이 1천원)으로 매우 저렴해 상업적인 공간은 아니다.

"2003년에 가시리 마을 이장과 청년회장이 저를 찾아와 폐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학교는 폐건축 자재 야적장 등으로 쓰이면서 밖에서 보면 마치 폐허 같았어요. 몇 개월 동안 공간을 정비한 끝에 미술관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관에는 가시초등의 옛날 사진과 책걸상 등이 전시돼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못 하고 있지만, 매년 자연사랑미술관 운동장에서는 마을 전통인 체육대회가 열렸다. 그렇게 정든 학교는 사라지지 않고 마을 사람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서 관장은 "폐교에 미술관이 개관한 이후 가시리 마을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주로 농사를 짓던 작은 시골 마을에 문화적인 색채가 더해진 것"이라며 "미술관이 앞으로도 마을과 공존하며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보여주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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