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영남의 자랑스러운 인물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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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08   |  발행일 2021-03-08 제26면   |  수정 2021-03-08
대구 산 지 30년 넘어 알게 된

학자 이원식·이종하를 비롯

유기농 포도농사꾼 김성순…

내가 존경하는 '영남 선비들'

대체로 이곳 고향서 푸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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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창 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교수

내가 존경하는 영남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은 대체로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 경산 출신의 삼성(三聖)인 원효, 설총, 일연은 알아도 대구 출신의 소설가 김영현이 '영남 3현'으로 꼽은 이오덕, 전우익, 권정생 선생의 이름을 아는 영남인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경북도의 시골학교 어린이들의 글모음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와 '일하는 아이들'을 펴내고 평생 한글 바로쓰기 교육에 헌신한 이오덕 선생과 봉화의 산골 농사꾼으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와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를 펴낸 전우익 선생의 흔적은 고향에서 찾을 수 없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 '강아지 똥'이나 '몽실 언니', 장편소설 '한티재 하늘'을 읽은 독자는 이승엽이나 김광석의 팬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그의 친구인 조영래 변호사는 전국의 많은 시민이 존경하는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지만 정작 대구시는 이분들을 기리기 위한 사업에 관심이 없다. 최근 권영진 대구시장은 이런 분들보다는 살아있는 권력이자 미래의 권력처럼 보이는 윤석열 검찰총장을 더 존경한다는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는 대구에 산 지 30년이 넘어서야 이원식 선생과 이종하 선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영남대 법대 노동법 교수로 대구지역 노동운동과 에스페란토운동에 헌신한 이종하 선생의 소략한 전기는 2008년 한국에스페란토협회에서 출판되었으나 이원식 선생의 유고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의사, 수학자, 서지학자, 사회운동가, 조형예술가, 시사만화가, 에스페란토운동가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선생의 유고를 모아 출판하고 유품을 정리하는 일은 유가족들과 함께 시민단체와 대학의 연구자들이 힘을 모아야 가능할 것이다.

1986년 국회에서 반공 대신 통일을 국시로 삼자고 제안했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쫓겨난 유성환 의원과 1979년 10·26 사건의 주역인 김재규 장군에 대한 평가도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단기적으로 보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혔던 인물들이 재평가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경북고 재학 중 2·28 학생 의거에 참여했다가 서울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윤무한과 성유보 선생도 내가 존경하는 선배지만 대구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위원장과 민언련 대표를 지낸 성유보 선생은 평생 언론자유를 위해 헌신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통치사료담당비서관(1993~1999)을 지낸 윤무한 선생은 인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조명한 '인물 대한민국사'와 '14인의 책 한국현대사를 말한다'를 남겼다.

김천의 유기농 포도농사꾼 김성순 선생을 아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선생은 기독교 장로지만 동학에 심취하여 일본의 조선침략 연구자인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교수와 93세의 동갑내기 친구로 교류하며 '일본의 조선침략사 연구의 선구자인 야마베 겐타로'를 번역, 출판했다. 요즘 다석 유영모의 사상에 빠져 새벽 두세 시까지 책을 읽었다며 '유영모의 귀일신학'을 보내주셨다. 책 내지에 써넣은 "영세중립국 선언 시대의 중심사상이 아닌가 합니다"라는 선생의 단정하고 힘찬 필체는 채찍처럼 게으른 후배를 일깨운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겸손하고 다정하지만, 심지가 굳은 영남의 선비들이다.
정지창 <문학평론가·전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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