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 심장소리] '순수의 시대' (마틴 스콜세지·1993(2017 재개봉)·미국)

  • 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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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17   |  발행일 2021-12-17 제39면   |  수정 2021-12-17 09:12
시대에 갇혀버린 옛 뉴욕 상류층의 사랑·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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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보는 시기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순수의 시대'는 몹시 좋아했던 영화인데 다시 보니 달랐다. 무엇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하는 뉴랜드의 우유부단함이 답답했고 미셀 파이퍼의 엘렌도 너무 연약해 보였다. 예전엔 이루지 못한 둘의 사랑이 마냥 애달프기만 했는데 말이다. 뉴욕 사교계에서 이름난 가문 아처가의 뉴랜드와 밍코트가의 메이는 약혼한 사이다. 유럽의 귀족과 결혼했던 엘렌이 돌아오자 뉴랜드의 세상은 균열이 시작된다. 결혼생활 파탄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엘렌을 돕던 뉴랜드는 어느새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철저히 질서에 순응하는 메이는 현실의 세상, 자유분방한 엘렌은 뉴랜드가 꿈꾸던 세상이다. 두 세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망설이고 고뇌하던 뉴랜드는 끝내 엘렌의 세상에 가지 못한다.

여성 최초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작가 이디스 워튼은 실제 상류층 출신이었다. 자신이 본 옛 뉴욕 상류층의 모습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그녀의 모습은 엘렌 캐릭터에 담겨있다. 미국 상류층의 허영과 위선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삶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소동보다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옛 뉴욕의 방식'이라 표현했다. '순수의 시대'란 제목은 그야말로 역설적인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고 알았다. 진정한 주인공은 사람을 옭아맨 '시대'라는 것을. 예전에는 두 연인의 아픈 사랑만 보였는데 말이다.

기존 질서가 전부인 줄 알았던 메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한 발도 나가지 못한 뉴랜드에 비해 엘렌은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반쯤은 시대에 갇혀버린다. 영화와 소설을 보고 자료를 찾다가 가장 앞서나간 사람은 작가 자신이란 사실에 놀랐다. 작가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적극적인 전쟁 구호 활동을 벌여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섬세한 문장, 냉혹한 리얼리티의 작가'로 평가되는 이디스 워튼은 주인공들을 냉정하리만치 현실적으로 그렸다. 한편으로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메이는 가식적이고 뉴랜드는 답답하고 엘렌은 나약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19세기 인물이다. 시대를 묘사하고 거기에 갇힌 인물들을 표현함으로써 작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 힘으로 시대를 뚫고 나간 것이 아닐까.

영화의 시작과 끝은 뉴랜드의 시선이다. 끝내 엘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대신 아들이 그녀를 만나는 것은 상징적이다. 시대에 갇혀 꼼짝하지 못한 자신 대신 아들이 이름처럼 뉴랜드 즉 새로운 땅을 밟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가 놓친 것에 대한 위로가 되겠다. 그럼에도 주름진 얼굴로 회한에 차서 끝내 돌아서는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슬프다. 명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아버지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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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시인·심리상담사
영화를 통해 시대에 갇혀버린 슬픈 인물들을 보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갇혀있지나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다. 시인·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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