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역사 간직한 상주농업의 상징…2009년 목부재 14점 출토

  • 김일우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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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15   |  발행일 2022-06-15 제22면   |  수정 2022-07-18 07:22
[상주, 삼백의 고장에서 스마트팜 도시로 .1] 삼한시대 4대 저수지 상주 공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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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못 옛터'라고 적힌 표지석.

◆시리즈를 시작하며= 경북 상주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농업 도시다. 농가 수는 국내 네 번째, 농업인구는 일곱 번째로 많다. 농지면적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여섯 번째로 넓다. 낙동강이
감싸 안고 평야와 산간지대가 고르게 분포해 농업 하기 좋은 환경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만큼 상주 농업의 역사도 유구하다. 구석기 이래 상주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해 원삼국시대부터는 벼농사 등이 본격화하며 농경문화가 찬란하게 꽃폈다. 특히 조선 시대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삼백은 원래 쌀, 목화, 누에고치를 뜻했는데, 지금은 목화 대신 곶감이 들어간다. 농업의 고장으로 이름난 상주는 최근 들어 친환경 농업 도시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다. 영남일보는 11회에 걸쳐 상주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한다.

낙동강 상류 지역에 위치한 상주시는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해 일찍부터 농경과 목축이 발달했다. 넓은 평야, 적당한 강우량, 여름철 높은 기온, 풍부한 일조량 등 상주는 농사를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다. 쌀, 곶감, 포도, 배 등은 이미 상주를 대표하는 특산물로 자리 잡았다. 수천 년 동안 상주 농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비옥한 토양을 이루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주, 삼백의 고장에서 스마트팜 도시로' 1편에서는 상주 농업의 기원을 상징하는 공검지(恭儉池)에 대해 다룬다.

자갈·진흙 다져 토성 쌓듯이 축조
'옛터 따라 수축' 고려사에 첫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둘레 8.56㎞
아이 '공갈' 둑에 묻었다는 전설도
1만3천18㎡ 복원 탐방로 등 조성
환경부 2011년 습지보호지역 지정

공검지(2011년)
2011년 헬기에서 촬영된 상주 공검지의 모습. 공검지는 충북 제천 의림지, 전북 김제 벽골제, 경남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4대 저수지로 꼽힌다. <상주시 제공>

◆상주농업의 시작 공검지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로 들어서면 '농경문화의 발상지 공검면'이라는 큰 기념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비 앞 작은 못에는 '상주 공갈못 옛터'라고 적힌 오래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바로 최소 1천400년 역사를 지닌 상주 공검지다. 공검지는 당시 농업에 꼭 필요한 관개시설(灌漑施設)이었으며, 상주 농업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상주 북부지역에 있는 공검면은 국사봉과 갈모봉 중심으로 서쪽은 산지(山地), 남동쪽은 구릉과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온난한 기후에 농업용수가 풍부하고 농토가 비옥해 일찌감치 농업이 발달했다. 현재 공검면에서는 벼농사를 비롯해 배·오이·토마토 등을 재배한다.

공검지는 삼국시대 이전인 원삼국시대(기원 전후~기원 후 300년)에 처음 만들어진 고대 농경용 저수지로 추정된다. 하지만 공검지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문헌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공검지는 토성(土城)을 쌓는 방법으로 조성했다. 물의 압력에 잘 견디도록 밑 부분의 너비를 부채꼴로 넓게 만들었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한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자갈과 진흙을 다져 빈틈을 없앴다.

공검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高麗史·1451년)에 나오는데 "상주목에 큰 못이 있는데 공검지이다. 1195년(명종 25)에 사록(司錄) 최정빈(崔正彬)이 옛터를 따라 제방을 쌓았다"라고 적혀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저수지가 있었다는 의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도 "둑의 길이가 860보(430m), 둘레가 1만6천647척(8.56㎞)이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웅대했던 공검지는 점차 규모가 크게 줄어든다. 1924년 공검지 주변에 경북선 철도가 부설되고, 1959년에는 공검지 서남쪽으로 3.5㎞ 떨어진 곳에 오태저수지가 새로 만들어졌다. 이에 공검지 대부분은 논으로 개간됐다. 수리시설 기능을 상실한 공검지는 오랜 세월 동안 그 흔적만 남겼다.

상주시는 1993년 공검지를 면적 1만3천18㎡(3천938평), 수심 3~4m로 복원했다. 경북도는 1997년 9월29일 상주 공검지 일대 0.14㎢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했다. 이어 1997년~2010년 공검지 일대 13만9천127㎡(4만2천86평)에 연지, 탐방로, 제방로를 조성했다.

공검지의 긴 역사만큼이나 공검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부터 공검지는 연꽃이 풍성해 꽃이 만발하면 중국의 전당호와 견줄 만했다고 한다. 또 공검지에 얼음이 어는 것을 보고 흉년과 풍년을 예측했다고 한다. 경주 용담의 암용이 공갈못 수용에게 시집 온 설화도 유명하다. 볶은 콩 서 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공검지를 돌면 콩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공검지는 예전에 '공갈못'으로 불렸다. 저수지를 쌓는 과정에서 둑이 계속 터지자 사람들이 '공갈'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묻어 둑을 쌓았다고 한다. 그 뒤론 둑이 더는 터지지 않아서 '공갈못'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 문신인 홍귀달(洪貴達·1438~1504년)의 명삼정기(名三亭記·1490년)에 나오는 슬픈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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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공검지의 현재 모습. 공검지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문헌으로 확인된 바가 없지만 최소 1천4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검지의 역사·생태적 가치

공검지는 충북 제천 의림지, 전북 김제 벽골제, 경남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4대 저수지로 꼽힌다. 밀양 수산제는 조선 시대 때 경작지로 바뀌어 사라졌고, 남은 공검지와 의림지(충북도 유형문화재), 벽골제(사적 제11호)가 조선 시대 3대 저수지로 유명했다.

경북도문화재연구원 등은 상주시 의뢰로 2005년~2011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공검지에서 시굴 및 발굴 조사를 벌였다. 1차 시굴조사(2005년)에서는 공검지가 고려 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修築) 또는 보축(補築)된 사실을 알게 됐다. 또 단면조사를 통해 1~4차에 걸쳐 제방이 쌓인 것이 확인됐다.

이어 1차 발굴조사(2009년)에서는 공검지 수문 시설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부재(木部材) 14점이 나왔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출토된 목부재들은 지금으로부터 1천400년 전인 655~695년에 벌채돼, 공검지의 수문 등 수리시설에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국내 고대 저수지에서 처음 발견된 목재 수리시설이었다.

2차 시굴조사(2010년)에서는 공검지 기반토를 포함해 크게 20개 층위와 토층 양상이 드러났다. 2차 발굴조사(2011년)에서는 공검지 제방 기초의 보강공법과 목재시설층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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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공검지 역사관에서는 시굴·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1천400년 된 목부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9년 4월 환경부 산하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은 공검지 일대 2곳의 땅을 각각 9m와 8.5m 깊이로 파내고 퇴적층에 남겨진 화석 돌말류의 출현량과 출현종의 특성을 분석했다. 그 결과 최대 6천년 전부터 자연 습지였던 공검지가 1천400년 전 인공저수지로 축조됐다는 사실을 생물학적으로 밝혀냈다. 또 당시 연구진은 150년 전 퇴적층(깊이 1.5~2m)에서 각종 돌말류와 수생식물에 붙어 사는 돌말류가 최대로 증가한 사실을 근거로 이 시기에 공검지 수위가 가장 높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공검지의 생태적 가치도 재평가 받았다. 환경부는 2011년 6월29일 공검지 일대(면적 0.264㎢)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공검지에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고 멸종위기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당시 공검지에서는 말똥가리·수리부엉이·잿빛개구리매 등 환경부 멸종위기야생동식물 3종과 원앙, 붉은배새매, 황조롱이, 소쩍새 등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7종 등 법적 보호종의 활동 모습이 포착됐다. 또 이를 포함해 공검지에는 모두 164종의 생물종(식물 79종, 조류 63종, 포유류 11종, 양서·파충류 11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에서 논습지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것은 공검지가 처음이다. 그동안 생산 수단 또는 공간으로만 여겼던 논을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생태 공간으로 인정한 첫 사례였다. 경북도는 2011~2012년 공검지 옆에 역사관을 세웠다. 역사관에는 공검지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와 함께 시굴·발굴조사에서 출토된 1천400년 된 목부재들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글·사진=김일우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전 영남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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