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뤼브롱산과 고르드 마을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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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9 08:05  |  수정 2023-11-24 08:43  |  발행일 2022-08-19 제36면
뤼브롱 산맥 주변 별처럼 반짝이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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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드 전경.

"저 숱한 별들 중에 가장 가냘프고 가장 빛나는 별님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내 소년 시절 가슴을 설레게 한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다.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대한 목동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별'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새 교과서를 받아서 책 꺼풀을 싸는 일은 새 학기를 다짐하는 가장 경건한 의식이었다. 국어 교과서는 특히 두툼한 달력을 고집했다. 읽을 책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 국어 교과서는 가장 많이 손때를 묻히는 책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지난 달력을 뜯어 책 꺼풀을 고이 싼 후 책을 훑다가 나는 단숨에 이 소설에 빠져 읽고 또 읽었다.

알퐁스도데 소설 '별' 배경지 프로방스
라코스테·루르마랭·쿠쿠롱 마을 등
뤼브롱 산맥 따라 곳곳 둘러보는 재미
고르드 '佛 가장 아름다운 마을' 선정
산맥 높은 구릉에 세워져 요새 역할
돌집 모인 보리마을, 박물관으로 변모


"내가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의 이야깁니다"로 시작하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소설은 '마지막 수업'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가 1885년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뤼브롱' '몽들뤼르' '피에몽' '마아로' '노라드' 같은 낯선 고유명사 속에서도 목동이 사랑한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소년의 마음에 오래 기억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소설에는 '프로방스 지방의 어떤 목동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프로방스'라니, 가장 프랑스다운 단어 아닌가. 그때부터였나보다. 프로방스는 언젠가는 꼭 가야 할 곳으로 내 기억저장소 한 귀퉁이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초로의 나이가 되어 목동과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프로방스 뤼브롱 산맥 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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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드 성.


남프랑스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그 목동이 아가씨를 기다리며 아직도 양을 치고 있을 것 같은 프로방스 뤼브롱 산을 가보고 싶었다. 영화 '어느 멋진 순간'(2006)의 배경지인 고르드를 목적지로 잡고 뤼브롱 산을 달려보기로 했다. 산이 깊어질수록 "몇 주일씩이나 사람이라고는 통 그림자도 구경 못 하고, 다만 양 떼와 사냥개 검둥이를 상대로 홀로 목장에 남아있어야 했습니다"라고 한 목동의 말이 실감 났다. 교행이 힘든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다 보면, 가끔 마주치는 자동차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해발 수백 m의 산상도로에서는 드넓은 프로방스의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보리마을
보리 마을.


뤼브롱 산 주변에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많다. 그래서 산길을 달리는 즐거움도 좋지만, 높고 낮은 구릉 위의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 요리조리 다녀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마을마다 두런두런 말을 거는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사드 후작이 살았던 라코스테(Lacoste)는 사디즘의 발상지이고,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1958년 노벨문학상 상금으로 뤼브롱의 루르마랭(Lourmarin)에 집을 사서 살았고 이곳에 묻혔다. 아비뇽 출신의 소설가 앙리 보스코도 이곳에 살았고, 영화 '어느 멋진 순간'의 원작자 피터 메일도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루르마랭 시장을 자주 다녔다. 로마 시대부터 있었던 쿠쿠롱(Cucuron)은 두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을 이름의 의미를 알고 보면 더욱더 재미있다. 'cuc'이 켈트어로 젖꼭지라는 뜻이라니, 두 개의 젖꼭지 위에 서 있는 마을이다. 영화 '어느 멋진 순간'에 등장하는 긴 사각 연못이 이곳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조선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기도 하다. 인근의 앙수이(Ansouis) 마을은 또 이브 몽탕 주연의 '마농의 샘' 촬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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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드에서 내려다보이는 프로방스 평원.


카피라이터로 유명한 피터 메일은 프랑스 사람보다 더 프로방스를 사랑했던 작가로 유명하다. 그가 쓴 '나의 프로방스'에는 이곳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뤼브롱 산자락의 오래된 농가를 구입해 살다가 2018년 메네르브(Menerbes)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메네르브를 '지중해의 햇살이 가득한 축복 받은 마을'이라고 했다. 피카소의 연인이자 사진작가 도라 마르도 이곳에 살았다.

뤼브롱은 이처럼 이야기가 가득한 멋진 마을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경관과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 라벤더가 지천인 허브의 천국, 최고급 버섯 블랙 트뤼프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와인이다. 해발 200∼500m에서 자라는 포도는 큰 일교차 때문에 느리게 숙성돼 풍부한 향과 우아한 맛이 어우러진 고급 와인이 빚어진다. 특히 1년 중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 320일이나 돼 와인의 아로마를 풍부하게 만든다고 한다.

영화 '어느 멋진 순간'은 런던의 증권맨 맥스 스키너(러셀 크로우 분)가 자신을 키워준 삼촌이 유산으로 남긴 와이너리를 처분하기 위해 뤼브롱으로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운명처럼 다가온 여인 페니 샤넬(마리옹 꼬띠아르 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결국 증권맨의 삶을 포기하고 포도밭을 되살리며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 나간다. 맥스는 "당신 같은 와인을 마시며 서로의 술잔을 채워줄 사람과 보낼 삶을 원해"라며 페니에게 프러포즈 한다. 원제 'A Good Year'는 최고의 빈티지 와인이 탄생한 해를 일컫는 말이지만 맥스가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된 해도 뜻하는 중의적 의미이다. 맥스는 페니와의 만남을 최고의 빈티지 와인으로 비유한 것이다.

푸른 하늘과 드넓게 펼쳐진 포도밭 위로 쏟아지는 투명한 햇살, 바람결에 묻어오는 라벤더의 향기, 넉넉한 이웃의 따뜻한 미소, 그리고 여유로운 저녁 식사와 한 잔의 와인 등 삶에 찌든 도시인들이 꿈꾸는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 영화는 프로방스의 자연과 삶을 정겹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도 이곳에 이미 15년이나 살고 있던 집이 있었고, 영화는 그 집 주변 마을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 주 배경이 바로 아비뇽 동쪽의 성채 마을인 고르드이다.

고르드는 뤼브롱 산맥 줄기의 높은 구릉 위에 세워진 마을로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됐다. 아비뇽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이 마을은 해발 373m에 세워진 마을로서 인구는 2천여 명 정도이다.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리면서 형성되었고, 마을에서 주변을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 마을이다. 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 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라 독일군의 보복도 받았다. 그때 마을 여러 곳이 파괴되기도 했다.

'고르드'라는 명칭은 원래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나무로 울타리를 세운 정착지 또는 방어 요새를 뜻한다. 고르드라는 마을이 생기게 된 내력이 이름에 모두 담겨 있는 셈이다. 이 마을은 천혜의 요새답게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도 있다. 게다가 건축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단단한 돌들도 지천이다. 성과 건물은 물론, 길바닥도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돌을 세로로 박아 놓았다. 이 돌이 석양에 반사되어 해 질 녘이면 마을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래서 또 '금고르드'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마을의 역사는 8세기에 베네딕틴 수도회의 생 샤프레(Saint-Chaffret) 수도원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1세기에 기욤 다구(Guillaume d'Agoult) 가문이 이 구릉 위에 거대하고 육중한 성을 세우며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성은 한때 파괴되었다가 1525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성과 함께 이 마을의 대표적 건축물은 생 피르맹(Saint-Firmin) 교회이다. 이 교회는 13세기에 지어진 성당 자리에 18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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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위에도 가볼 만한 곳이 있다. 마을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작은 돌을 쌓아 만든 28채의 집이 있는 보리(bories) 마을이 있다. 보리 마을은 여름철 목동들이나 농부들이 농사철에 이용하던 외양간, 빵 굽는 화덕, 포도주 저장고, 농작물을 타작하던 마당과 돌로 만든 주거들이 모여있다. 이 돌집은 최소 3천 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지속한 주거 형태로 이 지역의 강력한 미스트랄(돌풍)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튼튼한 구조물이었다. 현대화 과정에서 숲속에 방치된 돌집 마을이 지금은 선조들의 생활 모습과 농기구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5km 거리에는 라벤더 풍경으로 유명한 세낭크 수도원도 있다. 지금도 시토회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다른 수도원들과 달리 단순하고 소박하다.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거리는 6·7월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마을 주변에는 라벤더와 포도밭, 올리브와 트뤼프 농장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친절하지 않은 좁은 포석 골목을 헤매거나, 구석구석 보석처럼 박힌 갤러리를 기웃거리거나, 영화 속에서 페니가 일했던 레스토랑에 앉아보는 것 따위가 이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래도 즐겁다.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보다. 이 마을에는 찌푸린 얼굴이 없었다. 그럼데도 이 마을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돌집 그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사람을 구경하면서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게 만드는 곳이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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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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