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클래식 오딧세이]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 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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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9   |  발행일 2022-08-19 제37면   |  수정 2022-08-19 08:29
소련 찬양 하기에 부족…자아 비판서까지 쓰며 음악적 치욕

프로코피예프
프로코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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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러시아 혁명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던 프로코피예프는 1936년에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스탈린 정권 시기에 영구 귀국을 결정했다. 소련에서의 첫 출발은 명성과 인기를 얻으며 순탄해 보였고,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미래가 닥칠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런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소련에 도착한 프로코피예프는 희망에 부풀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소비에트 작곡가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소련에 정착한 후 처음으로 발레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1934년 레닌그라드 필름 스튜디오의 예술 감독이던 아드리안 피오트로프스키의 제안으로 처음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라들로프(레닌그라드 발레 극장의 감독)와 프로코피예프가 함께 합류하여 '드라마 발레'라는 새로운 형태의 발레를 만들고자 의욕적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라들로프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레닌그라드에서 공연하려 한 애초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과 계약했다. 하지만 소비에트의 관리들이 세익스피어의 원작과 다른 해피엔딩의 대본을 문제 삼았고, 극장은 이 작품의 공연을 당국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무기한 연기했다. 극장은 공산당 관리들이 문제 삼는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가 프라브다(Pavda, 소련 공산당 신문)에 비판의 글이라도 올라올까 불안해 주저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하는 예술작품과 아닌 것 즉, 부르주아 향수에 젖어 모더니즘으로 타락한 형식주의 예술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것은 검열이었고, 모든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이루는 인민들의 정신 교육을 위한 선동물'로 추락시켰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 개인의 관념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봤다. 결국 검열관들과 스탈린이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발레 공연이 무산되자 프로코피예프는 우선 이 곡을 오케스트라 버전과 피아노를 위한 10개의 모음곡으로 편곡했다. 발레 '로미오와 즐리엣'은 1938년 체코 슬로바키아 브르노의 마헨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소련에서는 1940년이 되어서야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극장(현재 상트 페테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안무가 라브로프스키는 작곡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악보의 일부를 일방적으로 수정했으며, 이 작품은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이런 과정을 지났음에도 스탈린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프로코피예프가 무척 고무되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있다.)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창작 활동이 보장되는 곳,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곳으로 옮겨 다니며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로 귀국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내 음악을 실현하기에 나는 너무 일찍 미국으로 왔다'고 이후 자서전에 썼듯이, 미국에서 한계를 느끼고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의 음악계는 그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스트라빈스키와 비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작곡가로서의 성장에 한계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중 프로코피예프의 활동에 큰 힘이 되었던 디아길레프(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 프로듀서, 무대미술가)마저 사망하면서 파리에서 그의 삶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유럽과 소련 중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창작 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소련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프로코피예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교향곡 6번과 피아노 소나타 9번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스탈린 다음으로 최고 권력자였으며 문화 정책의 총 책임을 맡았던 즈다노프가 그를 공격했다. 이 작품들은 나치를 꺾으며 승리를 쟁취한 소련을 찬양하기에 부족하며,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부르주아적'이라고 했다. 곧바로 프로코피예프는 인민의 적이 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작곡가는 자아 비판서를 썼다. 자신이 조성이 없는 무조 음악에 빠져있던 것을 인정하며 반성한다는 내용으로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의 음악(서방의 형식주의 음악)을 비판하며, 선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의 매우 치욕적인 글이다. 이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서술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할 것 같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가였고 그의 삶의 모든 기준은 음악 활동의 자유, 음악가로 인정받고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수많은 다른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음악을 제외한 현실 사회는 무의미했다. 음악가가 이런 삶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누가 비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정치·사회적 현상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의 결과는 너무나 혹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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