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성주 고산리 백세각…경북 유림 모여 파리장서 논의한 '성주 3·1운동' 본거지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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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9   |  발행일 2022-08-19 제16면   |  수정 2022-08-19 07:35

[주말&여행] 성주 고산리 백세각…경북 유림 모여 파리장서 논의한 성주 3·1운동 본거지
백세각은 야성송씨 충숙공파 종갓집으로 성주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파리장서운동을 논의한 곳이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며 경북 유형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 말만 들어도 심장이 펄떡거린다. '집을 사용할 당시, 수탉이 들어가면 도무지 울지를 못했다. 집 위로 독수리가 날다가 기운을 이기지 못해 마당 한가운데로 뚝 떨어졌다.' 말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힌다. 그러나 마을 앞 너붓한 들판 너머로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보자 숨이 탁 트인다. 그 가운데 조그맣게 드러난 가지런한 기와지붕과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나무들을 보자 영일(寧日)의 평안이 느껴진다. 도롯가의 조붓한 천을 건너서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개 짖는 소리 하나도 없는 고요다.

[주말&여행] 성주 고산리 백세각…경북 유림 모여 파리장서 논의한 성주 3·1운동 본거지
현대의 집들 사이로 난 짧은 길 끝에 사주문이 서 있다. 담장 너머로 무성한 회화나무가 솟아 있고 문 속으로 사랑 대청으로 오르는 반듯한 돌계단이 보인다.
[주말&여행] 성주 고산리 백세각…경북 유림 모여 파리장서 논의한 성주 3·1운동 본거지
백세각의 대문은 사주문이다. 담장 옆에는 야계가 처음 심었다는 회화나무의 후손목들이 무성하고 아름답게 자라나 있다.

◆영원을 꿈꾸는 집, 백세각

현대의 집들 사이로 난 짧은 길 끝에 사주문이 서 있다. 문 속으로 사랑 대청으로 오르는 반듯한 돌계단이 보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높은 기단 위에 횡으로 길게 올라앉은 건물과 마주한다. 안채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다. 그 옆 문간채의 곡진 문하방과 나무의 곡선 그대로인 문설주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안채 통로의 왼편은 사랑공간이다. 두 칸의 온돌방과 두 칸의 대청이 있고 그 앞으로 툇마루를 내어 평난간을 둘렀다. 온돌방에는 봉하(鳳下), 암하(巖下)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대청에는 야계고택(倻溪古宅)과 백세각(百世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가 명종 6년인 1561년 지은 살림집이다. 송희규의 본관은 야성(冶城)으로 지금의 경남 합천군 야로면이다. 호이자 택호인 '야계'는 '가야산의 시냇물'을 뜻한다.

그는 중종 8년인 1513년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9년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현풍현감, 호조정랑 등을 지냈다. 1534년에는 흥해 군수가 되었는데 이때 옥산(玉山)에 있던 이언적(李彦迪)과 왕래하면서 교분을 쌓았다고 한다. 1543년 이후에는 사헌부장령, 상주목사, 사헌부집의를 역임했다. 당시는 명종이 즉위하기 직전으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윤임(尹任)의 대윤파와 윤형원(尹元衡)의 소윤파 사이에 갈등이 심할 때였다. 송희규는 윤임을 옹호하다 파직당하였는데, 1544년 대윤의 지지를 받은 인종이 즉위하면서 복직된다. 인종의 시간은 9개월이었다. 결국 1545년 명종이 왕위에 올랐고 송희규는 소윤의 영수이자 왕의 외숙인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전라도 고산에 유배되었다.

송희규는 5년의 유배생활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이 집을 짓고 당호를 백세각이라 하였다. 백세각은 백세청풍(百世淸風)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백세청풍은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을 뜻한다. 즉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일컫는다. 그는 목수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첫째, 쇠못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대패질을 하지 말 것. 백세각은 자귀로 조각해 싸리로 얽은 집이다. 그가 요구한 것은 원칙과 정성이었던 듯싶다. 그가 원했던 맑고 높은 것,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 또한 원칙과 정성이 아니었을까.

송희규는 백세각에서 술과 시로 7년을 보냈고 두 번 다시 중앙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충숙(忠肅)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4년 뒤에는 조정에서 정려와 효우비를 세워주었다. 백세각 왼편에 그의 사당이 있다. 백세각 현판은 원래 한석봉의 글씨였는데 1970년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조선 전기 문신 야계 송희규가 건립
쇠못 안쓰고 자귀로 조각해 싸리로 얽어
올곧은 선비 정신 담아 정성들여 지어

3·1운동 때 백세각서 태극기 만들고
전국에 호소하는 '통고국내문' 제작
야성송씨 문중들 파리장서 도모하고
유림대표 137명 독립청원서 서명 받아



◆파리장서운동과 성주 3·1만세운동의 본거지

낮은 계단 위 열린 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간다. 폐쇄적인 사각의 공간이다. 3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건넌방과 마루방, 안사랑방, 부엌, 곳간, 마구간 등이 빙 둘러 자리한다. 부엌 위는 다락방이다. 처마에 문 절반이 그늘져 있다. 높으나 낮은 공간이다. 저 다락방에서 1919년 성주 만세운동에 쓰였던 태극기가 만들어지고 보관되었다. 또한 저 다락방에서 경북 유림들이 한데 모여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하고, 전국의 유림들이 일어나 줄 것을 호소하는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이 제작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김창숙(金昌淑)을 비롯한 유림 대표는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운동을 추진했다. 성주 지역의 야성송씨 문중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에 앞장선 사람이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다. 공산은 3월 초순 백세각에서 문중회의를 열어 시국 상황을 논의하였다. 이어 고향 후배인 김창숙을 만나 파리장서 계획을 협의하고 성주지역 서명자 규합에 나섰다. 유림대표 137명으로부터 독립청원서에 서명을 받았다. 서명인 중 야성송씨는 송준필과 송홍래(宋鴻來), 송회근(宋晦根,)이다. 송규선, 송천흠, 송우선, 송인집, 송수근 등은 서명인을 규합하는 데 힘썼으며, 송회근은 파리행 여비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3월23일 김창숙은 독립청원서를 짚신으로 엮어 숨긴 채 중국으로 떠났다. 독립청원이 마무리되자 지역 유림들은 성주 만세운동에 돌입했다. 백세각 다락방에서 '통고국내문' 작성, 3천장이 인쇄되었고, 태극기 3천장이 제작되어 보관되었다.

4월2일 오후 1시경, 유림을 중심으로 장터에 모인 3천여 군중이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만세 시위는 밤 11시경까지 계속되었으며, 왜경의 총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서너 명, 상해를 입은 사람이 수십여 명, 잡혀간 사람이 육, 칠십 명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1931년 대구에서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했던 송명근은 일제 군용열차에 군국주의를 타도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살포하여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백세각 야성송씨 문중에 독립유공자는 11인이나 된다. 백세각 사랑 대청에 면한 온돌방의 문 위에는 '통고국내문'을 새긴 목판이 걸려 있다. 첫 문장은 이러하다. '아!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려 있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사는 것과 같고,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야계 송희규는 백세각을 지을 때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 옛 나무는 화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백세각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야계가 심은 나무의 후손목이다. 무성하고 아름답다. 사라져도 이어지는 것이 영원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도 비 오는 날 자정이면 말발굽 소리가 들릴까. 백세각 옆 관리사에서 종손의 기척이 들린다. 그는 무서울 것이 없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Tip

달구벌대로 30번 국도를 타고 성주로 간다. 성주 교차로에서 성주읍 방향 오른쪽으로 나가 선산교 건너 로터리에서 3시 방향, 다시 로터리에서 2시 방향으로 나간다. 905번 지방도 주천로를 타고 직진하다 세종대왕자태실, 선석사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왼쪽 대장길로 빠진다. 칠선교 지나 벽진 방면 대고로로 좌회전, 초전초등 앞에서 다시 좌회전해 대고로를 타고 계속 가면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하늘 높이 보이는 길가 우측에 고산리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회관 맞은편으로 천을 건너 조금 들어가면 백세각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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