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천년을 넘어 영혼을 깨우는 그윽한 소리…신비의 울림 '에밀레종'

  • 김채한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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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9   |  발행일 2022-08-19 제38면   |  수정 2022-08-19 08:29
[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천년을 넘어 영혼을 깨우는 그윽한 소리…신비의 울림 에밀레종
에밀레종의 모습. 에밀레종이 이토록 귀중한 것은 종에서 진동이 다른 두 개의 소리를 나오게 하는 '맥놀이 현상'이라는 기술 때문이다. 두 소리는 서로 간섭하면서도 강약을 반복하면서 소리를 더 멀리 보낸다. 첨단 기술이다. 한국의 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의 꼭대기 부분에 원통형의 음통과 용이 만들어져 있다.
"열광에서 야만에 이르는 길은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가 말했다. 오늘의 우리 정치마당에 용케도 들어맞는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혹은 여당에서 야당으로 오고 간 길이 그저 한 단계에 불과한데도 마치 수백 단계를 거친 듯 열광적이고 야만적이다. 다퉈가며 비대위를 꾸리니 이런 야단도 법석도 본 적 있나. 그 덕에 폭염 아니면 폭우를 택해야 하는 눈치 빵점 장삼이사들만 갈수록 살아가기가 팍팍하고 괴롭다. 또래의 수학자 달랑베이와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친 28권의 '백과사전'을 함께 집필했던 디드로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진홍색 근사한 옷을 선물 받는다. 늘 갖고 싶었던 옷이다. 그런데 이 옷을 입고 서재에 들어서니 낡은 책상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새것으로 바꿨다. 그러자 책꽂이도 어울리지 않는다. 새 책꽂이로 바꿨다. 당연히 헌 의자도 거슬려 새 걸로 바꿔 버렸다. 새 옷이 결과적으로 서재를 바꾼 셈이다. 유명한 일화다. 이런 현상을 '디드로효과'라고 한다.

종 제작 위해 아이 희생 '인신공양' 전설 유명
국보29호 성덕대왕신종,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표면에 쓰인 1천37자 명문으로 제작시기 유추

진동이 다른 두 개의 소리는 '맥놀이 현상' 때문
종 아래 움푹 파 놓은 '명동 장치'도 소리 영향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의 부조 '비천상' 수려


◆디드로효과

마음에 드는 양말 한 켤레를 사고는 양말에 어울리는 구두를 사게 된다. 그러자 구두에 어울리는 바지를 사고, 뒤이어 셔츠와 안경과 모자와 머플러 심지어 지갑, 고급시계까지 맞춰 사야 직성이 풀리는 철딱서니 없는 강남 귀족들. 취임 겨우 100일의 현 정부나 그 반대편 '시침데기'들도 마치 디드로효과를 즐기는 듯 거침없이 온갖 새것으로 낡은 과거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독일의 해방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는 '낡은 것은 결코 낡아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이 낡아질 뿐'이라고 했지만 소용없다. 헌것은 무조건 싫다. 그러니 헌것을 치우려는 주위는 자나 깨나 헌것과 새것의 싸우고 박 터지는 소리와 깨지는 소리뿐이다. 정쟁이라는 이름의 어지러움이다. 중국 서한시대의 백과사전이었던 '회남자'에는 이를 '미비의동'이라고 했다. 죽이 끓고 개미가 들끓는 것과 같은 소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꾸는 꿈은 희한하게도 해피엔딩이라니. 꿈도 야물다.

세상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요 문장가였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그 소리들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듯 문무를 겸비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우에 맞는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라는 것이다. 여기다 개싸움에 물 끼얹는 소리를 덧붙인다면 그것은 무슨 탓일까. 개고기를 팔고 안 팔고를 따져야 하는 덤터기 정치 탓.
[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천년을 넘어 영혼을 깨우는 그윽한 소리…신비의 울림 에밀레종
봉덕사 신종 용뉴와 음통.
◆에밀레종

경주박물관에는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 있다.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으로도 불린다. 주조한 후 봉덕사에 처음으로 달았다 해서 봉덕사종이고, '에밀레'하고 애끓게 울린다 해서 에밀레종이다. 통일신라에서 제작된 동종이다. 성덕왕을 기리고자 아들인 경덕왕 때 주조를 시작해 손자인 혜공왕 때 완성된 큰 종이다. 1997년 정밀 측정한 결과 18.7t. 다행히 종에는 1천37자 명문이 쓰여 제작 시기와 동기와 제작의미까지 알 수 있다. 제작 후 1천200여 년 동안 전쟁이나 변고 등 갖은 시련과 풍상을 겪었으나 용케도 버텨 오늘에 이른다. 종의 제작에 '인신공양' 전설이 덧붙여지면서 최고의 이야기를 지닌 종이다.

지금은 보존이 아닌 '보전' 때문에 울릴 수가 없다. 에밀레종은 2020년 10월 17년 만에 타음 조사를 위해 울렸다. 이때 것을 녹음해 체험관에서 들을 수 있다. 대단한 울림이다. 다들 이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연암이 가려낸 분노, 교만, 놀램, 슬픔, 의심의 소리들마저 에밀레종 소리는 받아들인다. 세상이 화평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원만한 소리. 천년을 넘겨도 여전히 아름다운 소리는 현대과학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이를 말하듯 신종 종명의 서문에는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夫至道 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大音 震動於天地間 廳之不能聞其響)'고 적혀있다. '지극한 도는 도가 아니다'고 하질 않는가.

◆마음의 위안

이 종을 만들던 때의 신라는 기술과 예술 감각이 아마 지구상에서 최고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는 석굴암이나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이 세워졌다. 지금도 많은 학자나 일반시민은 거대한 에밀레종과 석굴암, 불국사의 석가탑을 신라의 보물로 친다. 에밀레종이 이토록 귀중한 것은, 물론 한국의 종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종에서 진동이 다른 두 개의 소리가 나오게 하는 '맥놀이 현상'이라는 기술 때문이다. 두 소리는 서로 간섭하면서도 강약을 반복하면서 소리를 더 멀리 보낸다. 첨단 기술이다. 한국의 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의 꼭대기 부분에 원통형의 음통과 용이 만들어져 있다. 잡음을 제거하고 소리를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하며 종 아래 바닥을 종의 아래 둘레에 맞게 움푹 파 놓았다. '명동'이라는 장치다. 다른 나라에는 없다. 소리를 더 공명하게 하며 화평한 소리를 내게 하는 장치다. 이 소리로 뭇 중생들은 마음의 위안을 찾으며 바른 삶을 영위하게 하다니 대단한 신기다.

우리의 종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에밀레종은 외형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빼어난 소리에 빼어난 아름다움. 종의 외곽 곡선은 이를 데 없이 유려하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으로 부조된 에밀레종 비천상은 천사처럼 날개가 없어도 자유로이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 수 있다. 이화여대 최준식 교수는 10년전 어느 글에서 '독일의 어느 학자가 에밀레종을 보고 우리나라에 이런 유물이 있으면 박물관 하나를 따로 세우겠다'고 한 말을 소개하며 세계 최고의 종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만사의 종소리

실은 에밀레종도 만들 당시에는 계속 종이 망가지자 '일전'이라는 이름의 종장은 번뇌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도 계속 실패만 하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의 집에는 과부가 된 여동생과 아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거듭되는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긴 여동생이 오빠의 고민을 눈치채고 자기 아이를 종 제작에 바치겠다고 한다. 깜짝 놀란 오빠는 곧장 절로 달려가 부처님에게 조카의 목숨을 구할 방도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날 밤, 오빠는 보살들이 나타나 방도를 일러주는 꿈을 꾼다. 아이 대신 목침을 넣으라는 것이다. 용광로에 목침을 넣자 기적이 일어났다. 목침이 아이 형상을 하고 활활 불이 붙는 것이 아닌가. 종장은 이 모습을 보며 마치 아이가 타는 듯해 울고 또 울었다. 종은 잘 만들어졌고 결국 아이는 무사하고 훗날 명승이 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아이를 던졌다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의 종에는 어울리는 이야기들이다.

[김채한의 사람과 선(線)] 천년을 넘어 영혼을 깨우는 그윽한 소리…신비의 울림 에밀레종
에밀레종 표면에 새겨진 비천상.
◆희생의 종소리

'적삼 벗고 은가락지 낀다'고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종들 또한 부지기수다. 물론 어울리지 않는 일들은 비단 종뿐이랴. 세상사가 그렇다. 중국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성 두보도 '밤에 들리는 종소리에 만사가 맑아지고, 새벽 종소리에 만호가 열린다(夜鐘淸萬事, 曉鐘開萬戶)'고 읊었고, 이백도 종소리는 '마음을 맑게 하고, 풍속을 깨우치고, 음양을 조화시키며, 또한 원기를 통달케 한다'며 종소리의 덕을 예찬하기도 했다. 기록상으로 신라 최대의 종은 경덕왕 때 만들어진 황룡사의 황룡대종이다. 그 규모가 성덕대왕신종보다 무려 4배나 큰 종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황룡사가 불타면서 소실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은 에밀레종보다 46년이나 빨리 만든 국보 36호인 상원사 동종이다. 신라 성덕왕 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이라 불리며 우리의 가슴에 가장 깊숙이 남겨지고 있는 것은 인신공양의 설화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며 아름답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은근히 원만하게 들려오는 저 울림. 유려한 곡선의 자태. 비천상의 자유분방한 저 움직임.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점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요 극작가요 영화감독이며 화가였던 팔방미인 장 콕도가 인류학자 토인비와 대담을 하면서 주고받은 말이다. 콕도가 '당신은 소리에 의해 침묵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음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토인비는 '침묵에서만 가능합니다'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렇듯 '소리'와 '침묵'은 이웃이다. 에밀레종이 지금은 침묵이지만 언젠가는 소리를 위해 나설 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직선과 곡선이 이웃이듯이. (연재 끝)

<전 달성문화재단 대표이사>

사진=사진작가 배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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