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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환 금성침대 대표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
전대미문의 감염병 코로나는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었다. 마스크와 비대면이 일상이 되었으며,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가 앞당겨 찾아왔다. 코로나에 기업들도 희비가 엇갈렸는데 전통을 고수하는 대다수 기업이 휘청거리며 위기감을 느꼈다면 반대로 재택근무의 확산으로 호황을 누린 기업도 있다. 한국의 침대 1세대 고중환 대표가 운영하는 금성침대도 그중 하나다.
구미 장천 시골마을 출신…중학교 졸업 후 서울 침대회사 취직
금성침대 창업한 후 IMF 위기 닥치자 프레임까지 자체 생산
대구 코로나 확산 때 1억원 기탁 등 사회공헌활동에도 열심
◆한국의 침대 1세대
그가 침대업에 뛰어든 1970년대 한국은 침대를 소유한 가정이 1% 미만으로 극히 드물었다.
경북 구미 장천의 가난한 시골 마을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배를 따라 서울의 침대회사에 취직했다. 지금은 침대 만드는 전 과정이 자동화 공정에 들어갔지만, 그때만 해도 매트리스 스프링 하나조차도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더벅머리 경상도 청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름때를 묻히며 성실하게 침대 만들기에 집중했다.
일 년여가 지났을까. 소위 메이저 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첫 직장에서 하루 일당 200원을 받았는데, 새로 옮겨간 곳에서는 650원으로 훌쩍 뛰었다.
사물을 통찰하는 눈이 남달랐던 걸까. 그는 스프링과 스프링을 연결하는 부품 '클립알'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회사 옥상에 금형 기계를 갖다 두고 홀로 연구에 몰두했다. 일과시간엔 회사 일을 하고, 마치면 자신의 부품을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나에 4~5원 하던 부품을 2원50전에 팔았는데, 그래도 곱절은 남았어요. 내가 만든 부품을 사겠다면서 메이저 회사에서 주문이 오기 시작했죠. 그때 전화기 한 대가 전셋값과 맞먹었기에 선배가 하던 금성냉장고 수리점의 전화를 빌려서 주문을 받았어요. 자연스럽게 금성공업사라는 상호로 소문이 나게 됐지요."
금성침대라는 상호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군대 월급이 10만원 하던 그 시절에 하루 20만원을 벌었다. 그는 "이대로 3년만 벌면 수유리에 4~5층짜리 빌딩 한 채를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단다.
◆위기 속에서 찾은 기회
공장 기계는 툭하면 고장이 났다. 특이한 것은 전날 저녁까지 멀쩡하게 돌아가던 기계가 아침에 출근하면 먹통이 된다는 것. 기술자를 불러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그때그때 임시방편을 해주는 것에 그쳤다.
직접 기계를 만지며 끈질기게 원인을 찾던 그는 마침내 스스로 고장 이유를 찾았다. 예민한 기계들이 밤이 되어 공장이 멈추면 추운 날씨에 습기를 머금어 작동을 멈추어 버린 것. 해법에 골몰하던 그는 직원들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기계가 아예 멈추지 않도록 주야간 24시간 가동체제로 들어섰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IMF 위기가 찾아왔다. 잘 나가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휙휙 쓰러지고 거리로 나앉았다. 이때 누군가 이참에 업종을 전환하고 매달 관리비를 따박따박 받을 수 있는 건물주가 되자는 제안을 한다. 평생 침대 외길을 걸어온 그는 거절하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침대를 만들 결심을 한다.
침대의 주요 부품생산과 기술특허를 가지고 있던 그가 IMF 위기상황을 거치며 매트리스뿐만 아니라 프레임까지 모두 자체 생산하는 금성침대 법인으로 새로운 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위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어떠한 문제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가구공장에서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재도 2번이나 있었는데 그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소중한 인연을 얻을 수 있었다며 회고한다.
"화재로 납품 기일을 맞추기 어려워졌는데, 침대업계 동료들이 발 벗고 도와줬어요. 어쩌면 제가 경쟁자일 텐데 낮에는 자신들의 공장을 돌리고, 밤이 되면 빈 공장을 제게 내어줬지요. 우리 직원들이 야간에 그곳에 가서 침대를 만들고 무사히 납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좋은 인연의 힘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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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침대 고중환(왼쪽) 대표가 경기도 양주 희망장학재단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다. <금성침대 제공> |
◆더불어 사는 삶
2014년 4월 TV에서 세월호 사고 소식을 지켜보던 그는 진도 팽목항 차디찬 바닥에 몸을 누인 희생자 가족에 눈길이 멈췄다. 가뜩이나 고통스러운데 차디찬 바닥에서 잠을 잘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당장 직원들과 트럭 가득히 침대를 실어 날랐다.
이뿐 아니다. 대구에 코로나가 확산하자 성금 1억원을 기탁한 것을 비롯해 △경로당 연탄 기부 △울진~삼척 산불 피해복구 후원 △양주시 희망장학재단 장학금 △재해구호협회 희망브릿지 기부 등 틈날 때마다 후원을 실천하고 있다. 그가 졸업한 구미 오상장학회에서도 선도적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오직 침대만 바라보고, 살아온 47년 외길 인생이었다. 국민 수면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좋은 품질의 침대를 자체 생산하는 회사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키워왔다. 현재 대형 종합 가구회사의 침대 OEM 생산을 하고 있으며, 금성침대 브랜드 또한 업계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월 2만 개의 매트리스 생산이 가능한 생산 자동화 라인 구축, 약 100여 개의 대리점을 보유한 전국 단위 침대 유통망까지 구축했다. 각종 온라인 쇼핑몰과 홈쇼핑에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깐깐한 품질 관리와 꾸준한 연구개발에 힘써온 그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2번이나 수상했다. 그가 만든 총 5개의 제품이 정부로부터 우수제품으로 지정되었다. 대통령 산업포장을 수훈했으며, 제품 안전의 날을 맞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로라 하는 대기업을 제치고 한국가구산업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금성침대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일대에 1만평의 공장을 가동하거나 추가로 건축 중이다. 이제는 아들 고규철 상무가 이어받아 2세대 경영을 열어가고 있다. 고 대표는 "되돌아보면 운이 좋았고, 여러 좋은 인연의 도움이 컸다. 앞으로도 직원들과 '나'보다 먼저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직한 침대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소망을 피력했다.
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정재훈기자 jjhoon@yeongnam.com

김은경

정재훈
서울본부 선임기자 정재훈입니다. 대통령실과 국회 여당을 출입하고 있습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