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농부와 페르소나

  • 장은주 뮤지컬 배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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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05  |  수정 2022-10-05 07:37  |  발행일 2022-10-05 제17면

[문화산책] 농부와 페르소나
장은주〈뮤지컬 배우·연출가〉

본업으로 돌아가 볼까. 내 본업은 농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도 키웠다. 출하하는 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춘돌이' 이후로 축산업을 포기했다. 숱하게 받은 질문은 '소는 누가 키우노?'였다. 적잖이 놀랐을 것 같지만 사실이다. 요즘 사람에게 '여자 인생 뒤웅박 팔자'라 하면 난리 나겠지만, 내 인생이 그랬다. 방년 18세, 소 키우는 첫사랑과 딸 낳고, 아들 낳고 농사짓고 살았다. 후에 뮤지컬 배우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본업은 농부다.

모내기 계절, 우리 집 비닐하우스에는 산딸기가 익어가고 나는 꼭두새벽부터 동네 아줌마들과 걸쭉한 농담을 하며 산딸기를 딴다. 일당 8만원. 토요일 빼고 한달을 온 식구가 매달린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낙찰금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누가 장미과(科) 아니랄까 봐 온몸이 산딸기 가시로 따끔거린다.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트르담'과 함께 빅토르 위고의 3대 작품 중 하나인 '바다의 일꾼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소설의 주제는 불가피한 존재로서의 자연이다'라고 언급했다. 나 또한 매 순간 햇빛과 비와 바람에, 그야말로 '불가피한 존재로서의 자연' 앞에 울고 웃는다. 영락없이 농부다.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시대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이크가 없던 시절, 명확한 대사 전달을 위해 고깔을 붙인 가면을 쓰곤 했는데,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또한 다양한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다. 무대에선 매력적인 배우로, 창작자로서 다양한 공연 장르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남편에겐 응석 부리는 불혹의 마누라,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아들의 교육비를 위해 쌈짓돈도 허투루 쓰는 일 없는 엄마로.

7년 전 나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를 재해석한 대구산(産) 뮤지컬 '투란도트'에 '류' 배역으로 캐스팅됐다. 오디션을 통해서였다. 나는 2015~2016년 '류'다. 그때도 아줌마였다. 기적이었다. 고정관념을 깨고, 획일화된 기준에서 벗어나 지역 배우이자 아줌마인, 당시 30대 후반인 내가 '류'가 됐다. 지금 생각해도 'DIMF 만세! 대구 만세!'다. 건강한 멀티 페르소나의 결과물이다.

타작의 계절, 가을이다. 이유 없이 허리가 아파 오는 걸 보니 진심 농부가 다 됐다.
장은주〈뮤지컬 배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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