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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21일 런던 메이페어 브루턴 거리 17에서 하얀 피부와 금발의 예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요크 공은 국왕 조지 5세의 차남이었고 백부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8세)가 황태자인 웨일스 공이었기에 '전하'라는 호칭과 함께 영국 공주의 직함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이가 미래의 여왕이 되리라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할아버지 조지 5세는 첫 손녀를 마냥 귀여워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옹알거리는 어린 공주 엘리자베스에게 '릴리벳'이라는 애칭을 지어 주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에드워드 8세가 심슨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하야하고 아버지가 조지 6세로 즉위하자 10세의 릴리벳은 차기 왕위 1순위, 즉 추정 상속인(heir presumptive)이 되었다. 이때부터 소녀 공주는 차기 왕이 갖추고 익혀야 할 제왕학을 비롯하여 본격적인 통치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공주는 여염의 소녀들과 다르게 인내심이 강했고 강단이 있었다. 숨 쉴 틈 없이 짜인 교육 일정을 묵묵히 잘 따랐다. 말 그대로 타고난 왕재(王才)였다. 공주의 유일한 취미는 말을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 것이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3세의 엘리자베스와 어린 마거릿 공주를 캐나다로 대피시키자는 내각의 제안이 있었지만, 조지 6세의 왕비는 "아이들은 나 없이 지내지 않을 것이며, 나는 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윈저 궁에 머물렀다. 영국 국민은 그러한 왕실 가족에게 깊은 존경을 보냈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먼 친척이자 미래의 남편이 될 그리스 및 덴마크 왕실 필립 왕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필립은 군사혁명으로 추방당해 몰락한 왕실 후예로 외가인 마운트배턴가에서 자라 영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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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
1945년 20세의 엘리자베스는 전쟁에 직접 참여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하여 구호품 수송 분야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원래 여자들로 구성되어 비(非)전투업무였던 부서는 전쟁이 커지자 운전, 탄약 관리 등의 전투업무로 확대되었다. 군번 230873 윈저 소위인 그녀는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병으로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임무를 수행했다.
흙바닥에 앉아 차량을 수리하고 무릎을 꿇어 트럭 바퀴를 교체하며 보닛을 열고 트럭을 수리하는 그녀의 모습은 국민의 마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미래의 여왕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5월8일 브이 데이(Victory in Europe Day·유럽 전승기념일)에는 동생 마거릿 공주와 런던 거리에서 한밤중까지 시민들과 승전을 축하하며 어울리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7년 가족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순방한 그녀는 조국인 영국과 영연방을 향해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 기념 대국민 연설을 했다. "내 삶이 길건 짧건 내 평생을 그대들을 섬기는 데 바칠 것을 그대들 앞에서 선언합니다(I declare before you all that my whole life whether it be long or short shall be devoted to your service)."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연설과 함께 현재도 영국인들에게 회자하는 명연설로 꼽힌다.
이때 그녀의 초대를 받아 윈저성에서 자주 만나 조국의 안위와 애국 그리고 해군 장교의 역할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필립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미 둘의 관계를 알고 있던 조지 6세는 1947년 7월 그들의 약혼을 선포하고 11월20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2차대전이 끝난 기쁨과 함께 전 세계를 향해 안정적인 영국 왕실의 미래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찰스 왕자가 태어나고 1950년 앤 공주가 태어났다.
1951년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져 엘리자베스 부처가 대신 외국 순방을 나섰다. 1952년 2월6일 그들이 케냐에 도착했을 때 조지 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즉시 영국에 돌아온다. 그녀는 1953년 6월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TV를 통해 전 세계 2천500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웅장하게 거행된 대관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로 즉위했다. 당시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대외적 위상 회복과 자긍심 고취를 위해 대관식을 더더욱 화려하게 진행했고, 전쟁 중이던 우리나라도 국무총리 서리를 특별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처칠의 우려대로 세계정세는 급변해 아버지 조지 6세 치세 중에 이미 인도를 상실한 여파는 실론, 미얀마, 말라야, 이집트, 짐바브웨의 독립으로 줄줄이 이어졌고 영연방 자치령들도 영국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독립된 정치 구조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연방과의 돈독한 관계 유지를 위해 즉위식 이후 6개월간 영연방을 순회했다. 이후 영국 군주로서는 50년 만의 인도 방문과 남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 순방 등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급속하게 추락하던 영국의 위상 유지에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입헌군주답게 평생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다만 적절한 선을 지키는 신중하고 매력적인 정치적인 표현으로 국민을 열광케 했다. 여왕이 국가수반으로서 의회 소집과 해산, 매년 가을 의회의 새로운 회기를 여는 모습은 영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한 총리가 선출되면 그를 임명하고 매주 화요일마다 총리를 만나 개별회의를 하며 나랏일을 논의했다.(단 한 번 블레어 총리가 개인사로 빠진 적이 있었는데 여왕은 격노했고 이후 총리는 다시는 회의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9월8일 영면할 때까지 처칠과 대처를 포함해 마지막으로 임명한 트러스까지 15명의 총리와 일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이렇듯 철저하고 조심스럽게 세운 왕실의 권위는 동생 마거릿, 딸 앤 그리고 아들 찰스와 앤드루의 결혼사와 이혼, 특히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으로 바닥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손자 윌리엄의 결혼과 증손자들로 왕실에 대한 호감이 되살아나 2021년 70년을 해로한 남편 필립 공 장례식과 2022년 즉위 70주년 플래티넘 주빌리에는 다시 전 국민이 애도하고 환호했다. 이렇게 현재까지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유지되는 것은 엘리자베스 2세의 지혜로운 처신 덕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22년 9월8일, 2차 세계대전 암흑기 이후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을 잇는 '동화 속 여왕'으로 세계인의 기대와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엘리자베스 2세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밸모럴 성에서 노환으로 영면했다. 향년 96세, 재위 기간은 70년 214일로 영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재위 기간이 긴 군주이며 21세기 군주 중 가장 오래 재위한 국왕으로 윈저성에 묻혔다. 그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웨일스 공으로 재위했던 73세의 장남이 영국 및 영연방 왕국의 최고령 국왕 찰스 3세로 즉위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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