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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우 (싱어송라이터) |
얼마 전 지인과의 만남을 위해 몇 년 만에 대백 부근에 갔었다. 만남이 끝난 뒤, 대백 맞은편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오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1970년대 중반 이곳 어디쯤인가 '파랑새'라는 라이브카페가 있었다는 기억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75년도 연예계 최초의 대마초 사건이 터지고 서울의 다운타운이 어수선했을 무렵 부산의 '낮과 밤'에서 노래하고 있던 친구의 연락을 받고 부산행 밤 열차를 탔다. 대구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친척들이 너무 보고 싶어져서 계획에 없던 대구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동이 틀 무렵 대구역에 내려 서울에서 나를 따라나선 DJ친구와 함께 숙박업소를 찾으며 대백 앞까지 걸어갔다. 십 년 만에 찾은 대구는 낯선 도시였다.
대백 뒤쪽의 선화여관에 방을 잡은 뒤, 저녁이 되어 대백 앞의 넓은 곳으로 나왔을 때 파랑새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들어갔던 이유는 부산에 간다고 해서 DJ친구의 일자리를 당장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대구에서부터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입구에는 훗날 '목화밭'이라는 노래로 알려진 '하사와 병장'과 포크가수들 사진이 붙어있었다. 알고 보니 하사와 병장은 전속가수로 있다가 얼마 전 서울로 올라갔고 대구의 포크가수 장성렬과 김미영이 노래하고 있었다. 파랑새 측에서는 하사와 병장이 빠진 자리에 서울의 포크가수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DJ친구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나에게 최소 석 달 이상 전속으로 노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부산으로 빨리 가야했지만 DJ친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다른 업소는 출연하지 않는다는 조건인 만큼 당시로는 최고의 개런티를 받았다. 그 당시 서울에서 내려올 때 지방업소의 음향시스템을 우려해서 들고 온 기타는 12현 기타였다. 12현 기타는 스트로크 사운드가 화려하고 풍부하지만 멜로디를 연주할 때 경험과 테크닉이 없으면 하모니사운드가 지저분해지는 경향이 있기에 라이브무대에서는 사용이 드물었다.
파랑새에서 DJ 이영민을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 호감을 가졌고 곧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서 DJ 박스 안에서 판을 틀 때도 음악을 들으며 글을 곧잘 썼다. 당시 그는 파랑새와 '그린음악다방' 등 시간대별로 여러 곳에 출연하는 인기 DJ였다. 석 달 후 대구를 떠나 부산에서 몇 개월 정도 노래를 했을 때, 그의 주선으로 울산의 라이브레스토랑 '고인돌'에 오픈멤버로 가게 되었다. DJ 이영민이 주축이 된 오픈멤버는 나를 비롯해 대구의 포크가수 정동원과 김미영이었다. 울산 '고인돌'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날들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이후 입대 연기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간 뒤 다시 무교동에 나가고 있을 때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울증이 있던 DJ 이영민이 스스로 생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노트 한 권을 그의 친구가 보내주었다. 자기의 글 중에서 발췌하여 노래로 만들어 달라는 편지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난 이후 음악을 포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지금껏 그의 유언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늘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다.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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