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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걸쳐진 안양교를 건너면 옥룡암 경내다.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안양은 곧 극락,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반야심경이 경내를 낮게 채우고 있다. |
'석초형! 나는 지금 이 너르다는 천지에 진실로 나 하나만이 남아 있는 외로운 넋인 듯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석초형, 내가 지금 있는 곳은 경주읍에서 불국사로 가는 도중의 십 리 허(許)에 있는 옛날 신라가 번성할 때 신인사(神印寺)의 고지(古址)에 있는 조그만 암자이다. … 석초형! 혹 여름에 피서라도 가서 복약이라도 하려면 이곳으로 오려무나. 생활비가 저렴하고 사람들이 순박한 것이 천년 전이나 같은 듯하다. 그리고 답하여라. 나는 3개월이나 이곳에 있겠고, 또 웬만하면 영영 이 산 밖을 나지 않고 승(僧)이 될지도 모른다.'
옥룡암 가는 길 계곡 가을빛이 깊어
경내 쓰러질듯 세 칸 작은 집 삼소헌
이육사 기거하며 '청포도' 초고 구상
대웅전 왼편 길로 올라가면 부처바위
탑·보살·승려·비천 빽빽하게 새겨져
관음전 저멀리 남천 너머 들판 한조각
피안에서 바라보는 속세 모습도 평온
◆경주 남산 옥룡암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절터에 지금은 옥룡암(玉龍庵)이라는 절집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지어졌고, 1936년과 1942년에 시인 이육사가 이 절집을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남천 변 둑길에서 탑골(塔谷)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안길과 나란히 흐르는 계류를 거슬러 조금만 오르면 곧 남산이고, 남산 중에서도 동쪽을 바라보는 동남산이다. 가을이 깊어 숲은 선홍빛이다. 계곡은 낙엽으로 뒤덮여 섬뜩하리만치 붉은 핏빛이다. 깜짝 놀라 저기 앞서 멀어지는 노부부의 든든한 뒷모습을 종종걸음으로 뒤쫓는다. 계곡에 걸쳐진 안양교(安養橋)를 건너자 옥룡암 경내다.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안양은 곧 극락,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반야심경이 경내를 낮게 채우고 있다. 1942년에 육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뜨거운 여름이었고 투옥되었다가 나온 뒤였다. 당시 폐 질환을 앓고 있었던 그는 홀로 아무런 행장도 없이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이곳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시인 신석초에게 편지를 썼다. '이곳으로 오려무나' 하고.
옥룡암은 계곡 옆 비탈진 산자락에 자연석으로 단을 쌓아 작은 전각들을 모신 아담한 절집이다. 정원에는 오래된 석탑 부재들과 마음이 가는 대로 쌓아놓은 듯한 석탑이 있다. 돌계단 위 붉게 흐드러진 애기단풍 너머로 대웅전이 보인다. 그 오른쪽 옆에 큰스님이 거처한다는 전각이 있다. 현판에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 쓰여 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왼편에는 말간 모습의 두 칸 삼성각이 자리하고 그 위쪽에 마당 너른 관음전이 위치한다. 관음전에는 '소림정사'와 '조종육엽'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양교 왼쪽에는 용왕님을 양각한 바윗돌 하나가 간소한 지붕 아래 모셔져 있다. 그 뒤로 물빛 검은 용소가 고요하다. 젊은 부부가 용왕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오래 기도를 한다. 안양교 오른쪽에는 요사채가 있다. 여인들의 낮은 음성이 들리고 라면 냄새가 솔솔 난다. 그 뒤에는 방문이 여럿인 건물이 있다. 옥룡암은 해방 이후 고시생들의 공부처로 유명했다는데 그 방인가 보다. "요즘도 학생들 공부하나?" "이제는 아닐걸?" 막 도착한 아저씨들의 대화에 귀가 쫑긋한다.
공부방 앞에 세 칸 작은 집이 있다. 기울어진 듯도 하고 쓰러질 듯도 하다. 처마 아래 '(삼소헌·三笑軒)' 편액이 걸려 있다. 이곳이 육사가 기거했다는 집이다. 그는 1936년 이곳에서 시 '청포도'의 초고를 구상했다고 한다. 1942년에는 약 1개월을 머물며 일경의 눈을 피해 포항까지 가서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석초에게 보낸 편지에는 3개월 정도 머물 것이라 했지만 일경의 감시가 심해 오래 머물지 못했다. 편지를 쓴 날은 7월10일로 되어 있다. 그는 8월4일에 다시 석초에게 시조를 적은 엽서를 보냈다.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촉 태워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 달 상기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 하노라.'
육사는 쑥스러운 듯 시조 앞에 '하도 답 안오내니 또 적소, 웃고 보사요'라는 머리글을 붙였다. 그들은 만났을까. 육사는 1944년 1월16일 베이징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삼소헌 앞마당에 수백 살 된 곰솔 두 그루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촘촘한 그물로 덮어 놓은 조막만 한 연못이 있다. 유유히 노니는 물고기들이 가을 깊은 이파리 같다.
◆남산탑곡마애조상군
대웅전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소소리 높이 서 있다. 뒤쪽은 산자락과 연결되어 절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면은 높이가 9m나 되고 전체 둘레는 30m쯤 되는데 면마다 부처님과 탑, 보살, 승려, 비천 등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보물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이다. 일명 부처바위라고도 부른다. 정면을 올려다보면 위쪽에 석가여래가 앉아 계신다. 양쪽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조각되어 있는데 탑 지붕의 처마마다 풍탁(風鐸)이 달려있고 층마다 창문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 마치 탑을 바위에 박아놓은 것 같다. 꼭대기에는 천인(天人)이 날고 탑 아래에는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왼쪽 바위 면에는 두 분의 마애불과 비천상이 화려하다. 갈라진 옆 바위에는 보리수나무 아래 선정에 든 스님과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의 형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선정에 든 스님을 조용히 지나면 산자락과 연결된 뒤쪽으로 오르게 된다. 흙으로 덮인 언덕진 땅에 바위가 살짝 솟아 있고 소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높고도 은밀하다. 솔 그늘에는 삼층 석탑이 서 있다. 솟은 바위에는 불당 안에 존치된 삼존불처럼 바위 면을 얕게 파내어 부처님 세 분을 나란히 새겨놓았다. 그 옆에는 높이 2m 정도 되는 석조 불상이 서 있다. 볼록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로 여성처럼 보이는데 왼손으로 아랫배를 살짝 만지고 있어 성스러운 출산을 돕는 안산불(安産佛)이라 전해진다. 삼존불과 안산불 앞에 툭 자리한 바윗덩이에 붉은 꽃 피어난 작은 화분이 놓여 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정면의 계단참에도 붉은 꽃 핀 작은 화분이 있었다. 출생에서 극락에 다다를 때까지, 매시간에 대한 기원이 작은 꽃으로 피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바위 밑으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물이 흐를 법한 수로는 확연한데 노란 은행잎으로 가득 차 물빛은 보이지 않는다. 수로를 건너 관음전 너른 마당에 오른다. 은행잎 흩어진 마당의 우물곁에서 마애불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정면으로 보인다. 돌아서면 대웅전의 뒷모습과 옥룡암의 아름다운 가을이 한눈에 들어차고 멀리 골짜기 초입과 남천 너머 들판도 한 조각 보인다. 피안에서 바라보는 차 안의 모습도 평온해 보인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가 직진하다 배반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간다. 사천왕사지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가다 화랑교 건너자마자 우회전, 약 600m정도 가면 왼쪽에 탑골마을 입구가 나오고 옥룡암 이정표가 있다. 초입에서 옥룡암까지는 약 300m로 마을 입구 주차장 이용을 권한다. 옥룡암 입구에도 작은 주차장이 있다. 경주IC에서 직진하다 상서장 입구에서 옥룡암 이정표 따라 들어가도 된다.
옥룡암 가는 길 계곡 가을빛이 깊어
경내 쓰러질듯 세 칸 작은 집 삼소헌
이육사 기거하며 '청포도' 초고 구상
대웅전 왼편 길로 올라가면 부처바위
탑·보살·승려·비천 빽빽하게 새겨져
관음전 저멀리 남천 너머 들판 한조각
피안에서 바라보는 속세 모습도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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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듯도 하고 쓰러질 듯도 한 세 칸 작은 집 삼소헌. 육사는 1936년 이곳에서 시 '청포도'의 초고를 구상했으며 1942년에는 약 1개월을 머물렀다. |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절터에 지금은 옥룡암(玉龍庵)이라는 절집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지어졌고, 1936년과 1942년에 시인 이육사가 이 절집을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남천 변 둑길에서 탑골(塔谷)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안길과 나란히 흐르는 계류를 거슬러 조금만 오르면 곧 남산이고, 남산 중에서도 동쪽을 바라보는 동남산이다. 가을이 깊어 숲은 선홍빛이다. 계곡은 낙엽으로 뒤덮여 섬뜩하리만치 붉은 핏빛이다. 깜짝 놀라 저기 앞서 멀어지는 노부부의 든든한 뒷모습을 종종걸음으로 뒤쫓는다. 계곡에 걸쳐진 안양교(安養橋)를 건너자 옥룡암 경내다.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안양은 곧 극락,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반야심경이 경내를 낮게 채우고 있다. 1942년에 육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뜨거운 여름이었고 투옥되었다가 나온 뒤였다. 당시 폐 질환을 앓고 있었던 그는 홀로 아무런 행장도 없이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이곳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시인 신석초에게 편지를 썼다. '이곳으로 오려무나' 하고.
옥룡암은 계곡 옆 비탈진 산자락에 자연석으로 단을 쌓아 작은 전각들을 모신 아담한 절집이다. 정원에는 오래된 석탑 부재들과 마음이 가는 대로 쌓아놓은 듯한 석탑이 있다. 돌계단 위 붉게 흐드러진 애기단풍 너머로 대웅전이 보인다. 그 오른쪽 옆에 큰스님이 거처한다는 전각이 있다. 현판에 '일로향각(一爐香閣)'이라 쓰여 있는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왼편에는 말간 모습의 두 칸 삼성각이 자리하고 그 위쪽에 마당 너른 관음전이 위치한다. 관음전에는 '소림정사'와 '조종육엽'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양교 왼쪽에는 용왕님을 양각한 바윗돌 하나가 간소한 지붕 아래 모셔져 있다. 그 뒤로 물빛 검은 용소가 고요하다. 젊은 부부가 용왕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오래 기도를 한다. 안양교 오른쪽에는 요사채가 있다. 여인들의 낮은 음성이 들리고 라면 냄새가 솔솔 난다. 그 뒤에는 방문이 여럿인 건물이 있다. 옥룡암은 해방 이후 고시생들의 공부처로 유명했다는데 그 방인가 보다. "요즘도 학생들 공부하나?" "이제는 아닐걸?" 막 도착한 아저씨들의 대화에 귀가 쫑긋한다.
공부방 앞에 세 칸 작은 집이 있다. 기울어진 듯도 하고 쓰러질 듯도 하다. 처마 아래 '(삼소헌·三笑軒)' 편액이 걸려 있다. 이곳이 육사가 기거했다는 집이다. 그는 1936년 이곳에서 시 '청포도'의 초고를 구상했다고 한다. 1942년에는 약 1개월을 머물며 일경의 눈을 피해 포항까지 가서 우국지사들을 만났다. 석초에게 보낸 편지에는 3개월 정도 머물 것이라 했지만 일경의 감시가 심해 오래 머물지 못했다. 편지를 쓴 날은 7월10일로 되어 있다. 그는 8월4일에 다시 석초에게 시조를 적은 엽서를 보냈다.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촉 태워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 달 상기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 하노라.'
육사는 쑥스러운 듯 시조 앞에 '하도 답 안오내니 또 적소, 웃고 보사요'라는 머리글을 붙였다. 그들은 만났을까. 육사는 1944년 1월16일 베이징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삼소헌 앞마당에 수백 살 된 곰솔 두 그루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촘촘한 그물로 덮어 놓은 조막만 한 연못이 있다. 유유히 노니는 물고기들이 가을 깊은 이파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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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1호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 정면은 높이가 9m나 되고 전체 둘레는 30m쯤 되는데 면마다 부처님과 탑, 보살, 승려, 비천 등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위쪽) 바위의 뒤편 언덕에는 삼층 석탑이 서 있고 솟은 바위에는 부처님 세 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마애불 옆에 서 있는 석조불상은 출산을 돕는 안산불이라 전해진다. |
대웅전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소소리 높이 서 있다. 뒤쪽은 산자락과 연결되어 절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면은 높이가 9m나 되고 전체 둘레는 30m쯤 되는데 면마다 부처님과 탑, 보살, 승려, 비천 등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보물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이다. 일명 부처바위라고도 부른다. 정면을 올려다보면 위쪽에 석가여래가 앉아 계신다. 양쪽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조각되어 있는데 탑 지붕의 처마마다 풍탁(風鐸)이 달려있고 층마다 창문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 마치 탑을 바위에 박아놓은 것 같다. 꼭대기에는 천인(天人)이 날고 탑 아래에는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왼쪽 바위 면에는 두 분의 마애불과 비천상이 화려하다. 갈라진 옆 바위에는 보리수나무 아래 선정에 든 스님과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의 형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선정에 든 스님을 조용히 지나면 산자락과 연결된 뒤쪽으로 오르게 된다. 흙으로 덮인 언덕진 땅에 바위가 살짝 솟아 있고 소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높고도 은밀하다. 솔 그늘에는 삼층 석탑이 서 있다. 솟은 바위에는 불당 안에 존치된 삼존불처럼 바위 면을 얕게 파내어 부처님 세 분을 나란히 새겨놓았다. 그 옆에는 높이 2m 정도 되는 석조 불상이 서 있다. 볼록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로 여성처럼 보이는데 왼손으로 아랫배를 살짝 만지고 있어 성스러운 출산을 돕는 안산불(安産佛)이라 전해진다. 삼존불과 안산불 앞에 툭 자리한 바윗덩이에 붉은 꽃 피어난 작은 화분이 놓여 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정면의 계단참에도 붉은 꽃 핀 작은 화분이 있었다. 출생에서 극락에 다다를 때까지, 매시간에 대한 기원이 작은 꽃으로 피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바위 밑으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물이 흐를 법한 수로는 확연한데 노란 은행잎으로 가득 차 물빛은 보이지 않는다. 수로를 건너 관음전 너른 마당에 오른다. 은행잎 흩어진 마당의 우물곁에서 마애불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정면으로 보인다. 돌아서면 대웅전의 뒷모습과 옥룡암의 아름다운 가을이 한눈에 들어차고 멀리 골짜기 초입과 남천 너머 들판도 한 조각 보인다. 피안에서 바라보는 차 안의 모습도 평온해 보인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가 직진하다 배반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간다. 사천왕사지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가다 화랑교 건너자마자 우회전, 약 600m정도 가면 왼쪽에 탑골마을 입구가 나오고 옥룡암 이정표가 있다. 초입에서 옥룡암까지는 약 300m로 마을 입구 주차장 이용을 권한다. 옥룡암 입구에도 작은 주차장이 있다. 경주IC에서 직진하다 상서장 입구에서 옥룡암 이정표 따라 들어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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