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내 낡은 서랍 속의 낡은 바지

  • 윤규홍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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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29 07:06  |  수정 2022-11-29 07:21  |  발행일 2022-11-29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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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규홍 (아트디렉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백만장자 제이 개츠비가 자기 옷장을 공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옷이나 장신구가 줄지어 걸린 부자들 드레스룸 장면도 이 소설이나 각색된 영화에서 나온 클리셰다. 값비싼 의류를 양복, 셔츠, 넥타이 식의 항목별로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사람은 집사나 하인이 아니라 개츠비 본인이었을 거다. 왜냐면 작품 줄거리와 묘사대로라면 주인공은 무척 계획적인 인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젊음과 부를 함께 가졌던 소설 속 주인공과는 한참 다른 내게도 옷장은 있다. 그 안에 제철에 입는 양복과 하얀 셔츠 여러 벌을 걸어놨다. 밝은 회색, 어두운 회색, 체크 회색, 감색, 검은색 옷을 순서대로 걸쳐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강박증일까. 면바지와 청바지는 옷장이 좁은 탓에 따로 넣어둔 서랍이 있다. 어린 시절의 개츠비가 매번 계획하던 결심처럼 나도 종종 세우는, 하지만 번번이 꺾이는 결의가 있다. '최소한의 모임과 최소한의 소비'다. 괜한 지출 때문에 지갑이 얇아지는 건 둘째 문제고, 내 공간에 물건이 쌓이는 게 가장 큰 부담이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자는 원칙을 세웠지만, 책만은 그게 어렵다. 하나 옷가지는 그럭저럭 실천하고 있다. 서랍에 바지를 넣는데 부피 때문인지 무게 때문인지 함 한 짝이 내려앉은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하나가 아니라, 안 입는 건 미련 없이 치우잔 생각으로 바뀌었다. 바지를 버릴 날을 잡았다. 하지만 다시 집어넣었던 것도 있다. 리바이스505, 랄프로렌 치노, 디키즈874 바지다. 펑퍼짐하지만 개츠비의 옷처럼 그것들은 뭔가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그 일 이후 몇 년이 흘렀다. 이른바 와이드핏이 유행하는 세상이 열렸다. 서랍만큼이나 낡은 내 바지들이 셀럽의 최애템 대접을 받으며 환대받는 유니버스라니. 하지만 이 세계 속에선 또 다른 경계가 그어진다. 어느 시점부터 중장년층의 바지통이 홀쭉해졌다. 바지만 그런 게 아니라 양복과 셔츠도 그렇다. 나이 있는 어른들이 젊음의 감각을 터득한 거다. 그런데 젊고 어린 친구들이 그럴 리가. 이들의 패션은 헐렁해졌다. 아빠 양복을 걸치고 나왔냐는 핀잔이 한때 있었다면, 이젠 부자지간에 옷을 바꿔입은 모양새가 판친다.

어쩌면 이것은 순리이며 역사다. 반세기 전 세계 하위문화를 이끌던 모드족은 공장노동자인 아버지들과 달리 싸구려 양복 차림으로 스쿠터를 탔다. 아버지가 양복쟁이들이던 중산층 아들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피츠제럴드를 읽는 비트족이 되었다. 청년은 한순간이라도 기성세대와 세계를 공유하길 꺼린다. 좋게 말하면 문화적 아방가르드고, 나쁘게 말하면 철부지 서브컬처다. 나는 젊은이들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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