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찰나의 연속성

  •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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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12 07:05  |  수정 2022-12-12 07:12  |  발행일 2022-12-12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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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대 명예교수〉

붓다는 모든 존재는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한다고 했다. 이어짐은 변화의 끝남이 명확하게 인식된 찰나의 연속적인 상태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찰나의 연속을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찰나와 찰나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사이에 단절이 있다. 꽃이 필 때 찰나찰나 꽃잎이 벌어지지만 우리는 어느 한 찰나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생각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흐름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하며 이어지는데 우리는 그 찰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깨어난 사람들에게 생각은 시간이라는 흐름을 타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그들에게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한 찰나, 곧 '영원한 현재'밖에 없다. 찰나의 자각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찰나로 살게 된다.

아잔 브라흐마는 '성난 물소 놓아주기'에서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소극적인 상태를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무아(無我)'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추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과거와 미래로 왔다 갔다 하는 방황을 멈추게 된다. 우리의 몸과 감정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다.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을 때는 시간상으로도 공간상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아주 잠깐은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로 달려간다. 반면 일어나는 마음을 지켜보는 마음은 몸과 감정처럼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사도 바울이나 왕양명과 같이 깨어난 이들은 지켜보는 마음을 빛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왜 그들은 지켜보는 마음을 빛에 비유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지켜봄으로써 대상이 밝아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생각이나 감정과 동일시하여 그 속에 있을 때는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지켜봄을 통해 그 생각이나 감정에 빛을 비춤으로써 그것이 한갓 영화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또 한 가지는 빛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빛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늘 영원한 지금만 있다. 오직 지금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빛은 특정한 속도로 공간을 여행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경험을 갖지 않는다. 몇 광년 떨어진 별에서 발사된 빛은 내 눈에 도달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지만, 그 빛 자체는 항상 지금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과거와 미래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비추는 마음은 항상 지금 여기에 있다. 생각과 감정에 빛을 비추는 순간 즉시 우리는 영원한 현재로 돌아오게 된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은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신에게 이르는데 시간보다 더 큰 장애물은 없다고 하였다. <대구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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